공인 · star

그들은 휴머니스트였다

사나예 2020. 5. 1. 19:50



 

 




       조선의 역사가 된 이방인들

    그들은 휴머니스트였다

 

 구한말 개화기에 조선에 와서 기독교 선교를 했던 북미의 선교사들을 탐사한 책.

12명의 북미 선교사들이 다루어진다.

 

메리 스크랜턴. 스크랜턴 여사는 가장 초창기에 선교사로 부임한 선구자 중에 선구자이다. 그리고 중년 여성이었으며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과 같이 조선에 왔다. 윌리엄은 의사로 의료선교 사역을 펼쳤다.

1885년 여름에 한양 땅에 중년의 서양 여성이 길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당시에 조선의 여인들은 꽁꽁 몸을 가리고서야 길을 지났던 때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조선의 여인들이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만 사는 현실을 애통하게 생각했다. 지체높은 양반집에서도 여자가 교육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대부분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나아가 가난한 천민 여성이나, 병에 걸렸다고 버림받아 성문 밖에서 구걸을 하는 처지의 여인들에 충격을 받았다.

 메리 스크랜턴은 미국에서 여성 평등사상을 배운 지식인이었다. 스크랜턴은 조선의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는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되 여성 교육을 중시하는 철학을 기조로 학교를 열었다.

 

당시에 남성 선교사들도 여러명 들어와 있었고 그들은 남성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스크랜턴이 시작한 여성 교육기관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을 남성보다 하등하게 여기는 강고한 유교문화의 벽은 높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86년에 마침내 학생들이 한명씩 입학하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종교 교리를 주입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자립하기 위한 교육이 급선무라고 판단해서 여성들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에 중점을 뒀다.

자신은 교육과 행정에 전문이었기에 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미국 선교부에 교사와 의사 파견을 요청했다. 마침내 1년 후엔 1886년에 로드와일러가 부임했다. 그녀는 조선에 온 최초의 서양 여성 의사이기도 하다.

 스크랜턴의 교육은 서양의 근대화를 일방적으로 조선인에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역사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을 교육 목표로 했다고 한다.

동시에 그녀는 크리스쳔이었기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바로 그러한 조선인의 조선인 됨을 인도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학교는 건실히 성장했고 정부 관리들과 고종 임금의 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나라의 인가를 받아 이름과 사액현판을 하사받았다. 고종은 배꽃과 같은 여성들을 위한 학당이라는 뜻으로 이화학당이라고 하사했다. 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77세의 나이로 1909년에 조선에서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의 인품은 그가 죽고 나서 드러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메리 스크랜턴이 죽었을 때 가난한 조선인부터 궁궐 관리까지 그녀의 헌신을 모두 칭송했다고 한다. 그녀의 장례식에 수천명의 조문객이 왔고 장례 운구 행렬이 5마일 (8km) 에 달했다.

 

 

 

헨리 아펜젤러.

이분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정말 교과서 적으로 알고 있었다. 1880년대에 조선에 와서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감리교회를 일으킨 목회자.

그런데 아펜젤러가 조선을 정말 사랑했음을 이 책으로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

 아펜젤러는 자신의 소명으로 한글로 영어 성서를 번역하는 것을 삼았다. 호레이스 언더우드와도 절친이었다. 가끔 선교사들에 대해서 오해와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분들 말에 따르면 교단 별로 서로 경쟁을 하며 서로 대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최근 몇 년간 읽은 책들에서는 그런 사실을 거의 접하지 못했다. 조선의 팔도 지방 별로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서로 나뉘어서 선교를 펼쳤던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경쟁이라기 보다는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들을 찾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또한 평소에는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고 교단의 정책에 따라 지내다가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서로 돕고 지냈음을 많은 자료들에서 알 수 있었다.

 

다시 헨리 아펜젤러로 돌아오면.

그는 성서번역위원회 조직을 꾸렸다. 동료 선교사를 비롯해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과 함께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1887년에 시작해서 3년만인 1900년에 드디어 신약 성경이 완전 번역되었다.

요즘 TV에서 서양에서 온 청년들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을 보면서 흐믓해 하고는 했다. 잘 하는 것 자체보다는 한국어를 참 아끼고 좋아하는 것이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아펜젤러는 원조 한국어 사랑 미국인이었다. 배울수록 한국어가 얼마나 휼륭한 언어인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1885년 스물일곱에 제물포에 발을 디뎠을 때 헨리 아펜젤러는 180cm이 넘고 90kg의 체중이었다. 그런데 1901년 즈음에 그의 몸무게는 59kg이었고 몸도 많이 상해있었다고 한다.

안식년을 맞아 조국인 미국에 갔을 때 친구들이 다 몰라봤다고 한다. 그래서 당분간이라도 조선으로 가지 말고 고향에서 쉬라고 하는 지인들이 많았으나 아펜젤러는 예정대로 돌아왔다. 필생의 미션으로 생각한 조선어 성경에 대한 열정이 가장 큰 동기였으리라고 보여진다.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한양으로 상경하는 배에서 풍랑을 맞아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는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사역에 참석하러 아펜젤러와 동료들이 목포에 갔다. 그런데 일본이 당시에 철도를 부설하고 있었는데  공사하는 현장을 아펜젤러와 동료가 지나가고 있었다.

일본은 그때 러시아와 치열하게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마침 목격한 서양인들을 보고는 간첩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자비하게 폭행을 했고 아펜젤러와 동료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재판을 받느라고 한양으로 상경을 뒤늦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목포에서 배를 탔는데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맞았다. 배에는 일본인들, 조선인들, 아펜젤러와 동료들, 미국인 25명 이 타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수영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배가 전복되자 마자 곧바로 갑판으로 나와 구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같은 일행인 정신여학교 학생이 안 보여서 그 학생을 찾으러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과정에서 구조를 받지 못하고 소천을 하셨다.

구조를 받아서 생존한 한 미국인 남성이 이를 증언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헨리 아펜젤러와 메리 스크랜턴.

그들의 삶을 읽으며 이들의 뜨겁고 진실한 사랑이 느껴져서 감동이 복받쳤다.

77세로 사망한 메리 스크랜턴, 44세로 사망한 헨리 아펜젤러. 서로 다른 분야에서 조선 사람들을 돕는데에 최선을 다했다.

문명 국가에서 온 사람이라는 거만함은 없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의 조국에 대해서 자랑스러워 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여성들이 싸워서 쟁취한 평등한 문화를 소유하고 조선에 왔다.

아펜젤러는 종교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조상들로부터 자유의 정신을 물려 받았다.

 

두 사람이 조선에 살면서 조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가난하고 비천한 여성, , 기생, 궁녀, 고아들에게 가장 먼저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펜젤러는 조선인들이 한국어를 천시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몸이 상해가면서 성경 번역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게 활동했다.

 

이 책에서는 몇 줄로 알았던 선교사들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알수 있어 좋았다.

정확한 앎이란 막연한 평가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들을 드러냄으로써 획득하는 것이었다.

 

아펜젤러와 알렌 (제중원 의사)이 서로 가끔 의견 대립을 했다는 이야기도 사실적이어서 흥미로왔다. 선교 사역의 방식과 방향을 두고서 두 사람이 치열하게 부딪히고는 했다. 동료들 사이에서 둘은 나름대로 라이벌이었던 것 같다.

아펜젤러의 소식을 듣고는 알렌이 충격을 받고 가슴 아파했다는 이야기도 찡했다.

 

1년 정도 책을 덮었다가 다시 펼쳐 읽은 계기가 어제 있었다.

cbs에서 '존 헤론' 이라는 선교사/의사 분의 삶과 죽음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헤론 이라는 분도 이 책에 있나 책장에서 책을 꺼내 보았다.

 

그분 이야기는 없었으나 12분의 이야기가 있어서 또 좋았다.

앞으로 한 분 씩, 읽어나가야지~~.

 

 

 

 

 



'공인 · sta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극히 사적인 러시아  (0) 2022.07.17
노 히어로 no Hero 회고록  (0) 2021.10.24
극한직업  (0) 2019.04.28
하와이 파이브 오  (0) 2019.04.01
베델  (0) 2019.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