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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

사나예 2019. 2. 21. 03:50

 

 

 

 

 

영국 출신의 언론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셀. 한국이름 배설은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인 배설이 소유한 신문사로, 당시에 유일한 영어 신문이었다.

일제 통감부가 운영하는 영어 신문을 빼고는 외국인이 직접 발행하는 영자신문이었다.

 

책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동포를 구하라>.

긴 제목의 이 책은 배설에 대해서 정진석 이라는 분이 연구하여 펴낸 책이다.

 

배설에 대해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조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던 영국인이, 어떻게 한국에 와서 항일 사상을 고취하는 신문을 발행했을까.

 

저자인 정진석은 한국외대 언론학 명예교수이다. 사실 정진석도 이 점에서 처음부터 배설에 끌렸다고 한다. 저자가 연구에 뛰어든 때만 해도 배설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극히 적었다.

그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면서 한국 민족의 편에 서서 일제를 규탄했다는 사실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책은 무척 전문적이지만 저자의 ‘동기’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기에 수월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읽다가 난관을 만났다. 생각보다 1900~1909년의 한국의 역사가 너무도 낯설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국사 시간에 암기로 배웠던 지식들이 읽는 내내 두서없이 소용돌이쳤다.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 러일전쟁,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 퇴위, 한일합방의 치욕.

 

배설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자 했는데, 뜻밖에 이 사건들이 서로 긴밀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책을 통해 배설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의 역사들을 소환할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70페이지까지 낯선 역사에 정신을 못차리다가 겨우 맥을 잡았다.

100페이지 쯤부터는 단편적으로 아는 지식들이 드디어(!) 등장하면서 이해를 하면서 읽었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 뿐 아니라, 일본 쪽에서 진행한 일들, 나아가 영국의 입장까지 종횡무진 나오기에 이해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이후에는 처음 접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자세한 일들을 읽으면서 전율하였고 죄스러웠다.

이제라도 알아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의미를 차지하는 인물과 신문이었다.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로 줄임)가 일제에 의해서 집요하게 탄압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당시에 일본이 치밀하게 조선 침략을 계획하였음을 알게 된다.

 

당시에 영국인 소유인 신보사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일제에 항거하는 우국지사들이 비교적 마음 편하게 뜻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는 배설이 한국인들을 지지하고 같이 싸웠기에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영일 동맹이었던 일본 통감부는 지속적으로 영국 외교부에 로비를 벌였다.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고, 때로 말도 안되는 이유로 배설을 조선에서 추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게 어찌나 극심했던지 주한 총영사관도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배설은 영국 고국의 압박, 일본의 감시와 견제에 굴하지 않고 소신 있게 논설을 내고, 기사를 실었다.

조선 민중들은 이런 대한매일신보를 열렬히 응원하였고, 당시에 최대발행부수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중의 압박은 끝내 배설을 재판으로 몰아세웠다. 배설을 도와 신보를 이끌은 양기탁 총무에게는 노골적인 공세를 펼쳐서 옥고를 치르게 한다.

 

이 책은 몇 번은 더 읽을 가치가 있다. 이번에는 사실을 이해한 것으로 만족했다.

 

책의 하이라이트는 단언코 배설의 두 번의 재판이었다.

서울 정동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의 재판.

그리고 중국 상해 고등법원에서 치른 2번째 재판.

 

일제는 통감부의 미우라의 주도로 직원을 앞세워 배설을 고소했다.

배설의 신문이 한국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평화를 교란하고 질서를 문란케 해 치안을 해친다고 했다.

나아가 의병 투쟁을 주동하였고, 박은식 신채호 등의 논설로 항일 사상을 고취한다는 사유를 들어 고소했다.

구체적으로는 10건의 기사, 논설 등을 재판정에 제시하였다.

 

재판이라는 것은 고소에 대해서 ‘항변’하는 형식이 기본이다.

배설을 변호한 변호사는 크로스 라는 영국 사람이었다.

 

뜻밖에 크로스의 변호가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크로스는, 배설의 신보가 반일, 항일 논조인 것은 맞지만 적시된 기사들이 의병을 봉기시켰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한국의 백성들과 의병이 일어난 것은 신보 때문이 아니라,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그 과정에서 잔인한 진압과 학살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소의 내용에 조목조목 대응했다.

 

변호인의 변론은, 정진석의 표현대로 당시의 약소국 한국이 처한 상황을, 상하이의 국제적인 법정에서 침착하고 스마트하게 펼친 자체였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변론 부분을 읽는데 어찌나 울컥 울컥 하던지.

 

배설은 한국에 거주하는 영국인 중에는 거의 유일하게 항일 활동을 나서서 드러나게 했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가 밝히는 것은, 배설이 그럴 수 있었던 데는 뒤에서 조용히 동조한 서양인들의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도움은 극소수였지만, 아무도 배설을 비난하지 않았고 암묵적으로 배설의 행위가 옳다고 여겼다고 한다.

 

주한 영국 총영사관의 대표 코번은 중간에서 난처함을 온몸으로 겪었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내려오는 지령대로 배설을 압박했지만, 계속 지켜보면서 총영사는 배설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국운이 쇠해가는 조선에서 코번의 영향력은 미비했고, 배설을 도우다가 본국으로 송환하여 가게 되었다.

 

정진석은 최대한 사실들을 많이 펼쳐놓는 컨셉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배설과 헐버트로 대변되는, 한국 민중의 편에 적극적으로 섰던 서양인들의 사정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일제 통감부의 자료를 비롯하여 일본 쪽에 있는 자료까지 참고하고, 직접 영국에 가서 관련된 사료를 샅샅이 뒤져서 그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화하기가 어렵지만, 그것들을 인지한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읽어나가게 된다.

신보사에 직접 몸담았던 기자들, 신민회, 배설과 양기탁과 뜻을 같이 했던 애국지사들의 이름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파편적으로 알았던 사건들이 서로 긴밀한 연관을 갖게 됨을 발견할 때는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대한매일신보사는 신민회를 태동시켰음을 알았다. 또한 숱한 의병들이 신보를 읽으며 당시의 뉴스들을 접했고, 비분강개하여 분연히 봉기했다는 걸 알았다.

 

100년도 더 전의 일이라 이색적인 것들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당시에 신문이란 매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와 영향력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우리나라도 불과 10년전에는 지하철에서 신문을 두고 내리고, 누군가 집어서 읽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1909년에는 신문이란 희귀한 존재여서 한번 구입하면 수십번을 읽었다고 한다.

 

귀한 신문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신문종람소에서는 목소리 좋은 사람이 신문을 읽어주고 사람들이 둘러 모여서 열심히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신문의 위력과 존재감이 상상을 뛰어넘는 시대였다.

그런 때에 항일 투쟁을 자처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 하나, 논설 하나가 얼마나 파괴력을 지녔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등박문은 대한매일신보를 상당히 견제했고 배설을 추방하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배설은 1909년 5월 1일에 서울 정동의 한 호텔에서 갑자기 급서하였다.

 

눈엣가시였던 영국인 언론인이 죽었으니 통감부와 이등박문은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이 암살되는 거사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배설이 죽으면서 동력을 잃은 대한매일신보는 통감부에 의해 매수되었다.

신문 제호를 변경한 신문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신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한국의 독자 그 누구도 새 신문을 이전과 동일하다고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설과 함께 신보를 맡은 중추적인 인물인 양기탁에 대해서 소상히 안 것도 너무 기뻤다.

양기탁은 신문이 폐간하고 한일합방이 발생한 후 즉시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책에 나오는 여러 애국지사들의 이름 뒤에는, 괄호 쳐지고 1930년대 중후반에 사망일이 적혀 있어서 숙연해진다.

 

배설의 상해 법원 재판에서 통역을 김규식이 했음도 처음 알았다.

크로스의 변호의 내용은 명 변론이었는데, 김규식의 통역도 완전 유창했고 듣기에 대단히 좋았다고 한다.

 

몇 년 전에 본 <박열>의 재판장면이 오버랩되어 가슴이 뜨겁게 재판장면을 읽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법정을 철저히 짓밟아주면서, 유창한 일본어로 했던 그 변론들.

용기와 지혜가 넘치면서, 재치까지 있어서 울다가 웃게 했던 그 명 대사들.

 

우리는 배설의 재판 과정을, 진지하게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변호인은 변호라는 업무에 충실했을 뿐인데, 그 과정에서 일제의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였고,

의병의 봉기의 정당성을 주장한 그 내용에 한없이 가슴이 뜨거워졌다.

 

앞부분은 조금 복잡할 수 있지만,

1900년대 초 우리 역사를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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