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주먹이 운다> 감독님 인터뷰.

사나예 2005. 4. 12. 02:41
이젠 영화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

이전과 다른 연출 스타일로 완성한 <주먹이 운다>는 류승완 감독에게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변했는가. 걸작을 욕망하는 대신 다작을 다짐하는 감독 류승완을 만났다.

시사회 분위기는 어떻던가? 통곡의 바다인가?
 관객에 따라 반응이 엇갈린다. 아이가 있는 사람은 강태식(최민식)에게, 없는 사람은 유상환(류승범)에게 주로 감정이 이입되는 모양이다. 중년층과 청년층이 서로 몰입하는 캐릭터가 다르다는 게 재밌다. 그러니 이 영화야말로 단체 관람할 만한 영화 아닌가. (웃음)

영화가 좀 길다. 지금이라도 상영 시간을 줄일 생각은 없나.
 나도 긴 영화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엔 더 이상 못 줄이겠다. 난 이 영화가 계속 느린 호흡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엔딩의 폭발력이 나온다는 확신이 있다. 관객들이 차분하게 인물에게 몰입해서 마치 자기가 아는 사람 둘이 피 터지게 싸우는 느낌을 갖게 하고 싶었다. 관객들이 훌쩍거리는 것 보다 더 기분 좋은 건 둘이 난타전을 벌일 때 "아우 어떡해, 아우 어떡해"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거다. 마치 선수 가족의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 보게 되는 거지. 일전에 정두홍 무술감독의 프로 복서 데뷔전을 보면서 내가 그랬다. 왜 가족들이 경기장에 못 오는지를 알겠더라. 그러려면 이 영화는 이 정도 길이가 나와야 한다. 게다가 요즘 세 시간 넘는 영화도 많은 데 겨우 15분 긴 걸 못 견딜까봐.

지금까지 본 류승완 감독 영화중에 클라이맥스가 제일 세더라. 늘 치명적인 단점이 클라이맥스가 좀 약하다는 것이었는데.
예전엔 ‘나에게 언제 또 이런 연출 기회가 올까’ 하는 생각에 매 신마다 온 힘을 다해 찍었다. 이번엔 극 중반부에 나오는 액션 장면들을 일부러 샷도 안 나누고 힘도 안 주고 찍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이 링에서 만났을 때 가장 파워풀해야 하기 때문에 앞부분에서는 힘을 좀 아껴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 관객의 눈물을 자아낼 거면 더 울게 만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더 울고 싶은데 영화가 끝나더라는 관객들도 많다. 아직도 절제에 대한 작가적 강박이 있는 건 아닐까.
결말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생각했다. 태식이 죽는 결말도 있었다. 그러면 <챔프>와 비슷해진다. 이야기가 비극이 되면 너무 멋 부리는 것 같았다.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고민에서 지금의 결말이 나오게 된 거다. 어떤 결말을 선택하든 마지막 이미지는 안 바뀌었을 거다. 그 이미지 때문에 이 영화를 시작한 거니까. 그 마지막 컷의 여운을 간직하면서 엔딩 크레딧 끝까지 보면 눈물 나오게 되어 있다고.(웃음)

[[2]]영화를 보기 전, 마지막 경기 장면을 어떻게 찍을까 궁금했다. 관객이 어느 편을 응원해야 좋을지 모르게 만들려면 카메라 시점을 어떻게 할건지 중요하니까.
애초에 연기자들에게 요구했던 게 일관성에 얽매이지 말자였다. 연출도 마찬가지다. 기존 어떤 영화로부터도 자유롭고 싶었고 내가 만든 그 어떤 영화와도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권투 영화 찍는다면 가장 먼저 리스트에 올라오는 참고 자료가 <성난 황소>, <록키>, <챔프>, <알리> 뭐, 그런 것들 아닌가. 그 영화들을 어차피 내가 못 뛰어넘을 바엔 아예 다르게 가야 하지 않나 싶더라.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겠는 거다. 그러다 그냥 아무런 계산도 안하고 즉흥적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무언가 캐치하면 그게 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마지막 경기 장면에서 테크니션 류승완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겠구나 하는 기대를 했는데 그렇게 안 찍었다. 연출할 거리가 무궁하게 많은 장면을 그냥 덩어리로 찍어버리다니.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이번엔 연출자가 한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는 식으로 말해서 나오는 반응 같기도 하다. 결승전 6라운드에 쓴 고속 촬영 이미지들이나 3, 4, 5라운드의 몽타주 시퀀스에서 보이는 카메라 무빙은 여전히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취향대로 찍은 거다. 특히 결승전 2라운드 경기 장면은 내가 지금까지 찍었던 롱테이크 장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둘의 등판 근육 움직임이나 스탭 밟으며 이동하는 율동감이 좋다.

장면에서는 스테디캠을 사용했던데.
내가 원래 스테디캠을 좋아한다. 그런 롱테이크 액션에 대한 욕망이 있다. 2라운드에 쓰인 장면이 원래는 1라운드 편집 소스로 찍어둔 장면이다. 마스터 샷으로 쓰려고 한번은 링 밖에서 찍고 한 번은 링 안에서 스테디캠으로 찍어 둔거다. 그런데 편집해 버리기가 너무 아까운 거다. 눈속임 없는 배우들의 실제 경기를 보는 쾌감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어떤 영화에서도 그렇게 찍은 권투 장면이 없었다. 그게 좋았다. 현장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그걸 통째로 2라운드 장면으로 가겠다고 결정했다. 스탭들이 난리가 났다. 우리 너무 막 찍는 것 아니냐 하면서.(웃음) 실제 권투에서도 1라운드는 탐색전을 벌인다. 따라서 내부의 감정이 처음부터 드러날 필요가 없으므로 링 밖에서 찍고 2라운드에서 링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였다. 또 하나 염두에 둔 건 그 경기가 시끄러운 경기가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데 링 바깥은 오히려 조용하게 구경하는 분위기를 원했다. 그런 분위기가 그 컷으로 나올 것 같았다.

권투 장면을 찍을 때 고민이 많았겠다.
김홍준 감독이 그랬다. <성난 황소> 이후에 권투 영화를 찍는 다는 건, 링 위에서 뭔가 한다는 건 무의미한 짓이라고. 나도 공감한다. <성난 황소>를 다시 봤더니 이건 뭐 도저히 링에서 불가능한 샷들이 막 나오는거다. 모든 게 너무 완벽해. 샷 분할이며 카메라 이동이며. 단 한 가지. 미국 애들은 진짜 못 때리거든. 하지만 우린 진짜 때린다.(웃음) <주먹이 운다>를 찍으면서 액션의 감정이란 게 액션 장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정 보다 액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정작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에는 그냥 양식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찍어내고 보여 주느냐의 싸움인 것 같다.

마지막 링에 오를 때 진짜 바닥까지 내려간 두 주인공은 링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자존을 회복하는 것 아닌가. 그 대목에서 두 사람이 권투 선수로서의 전문가다운 모습을 드러낼 세부 묘사가 들어가 주길 바랬다. 영화는 결국 두 사람의 피로감만을 부각하는 쪽으로 흐른 것 아닌가.
그건 연기의 디테일에서 충분히 표현이 됐다고 생각한 거다. 이를테면 둘이 처음에 링에 올라가 인사할 때 강태식은 링이 아주 친숙하고 당당한 것처럼 인사를 하고 상환은 눈도 못 맞추고 인사를 한다. 그건 배우들의 계산이다. 영화를 눈여겨보면 태식은 싸울 때 호흡도 별로 안 뱉는다. 노련하게 체력 관리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물론 자세도 유연하다. 그래도 강태식이 한때는 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한 선수 아닌가. 반면 상환은 정석대로 가드 올리고 들어간다. 그런 차이를 줬다.

그걸 보완할 방법이 중계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스포츠 소재 영화에서 해설이 주는 위력이나 편리한 점이 분명 있다. 작은 멘트 하나가 연기에 서스펜스를 주는 거다. 보다 친절해지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뺐다. 권투 영화들이 만날 그렇게 해왔으니까. 중계 방송이라는 것이 효과를 가지려면 <알리>처럼 아나운서와 선수간에 무슨 연결 고리가 있다거나 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마지막 신 하나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쓰기는 싫었다. 사실 정석대로라면 가장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6라운드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점 샷이 들어가주는 게 맞다. 하지만 그것도 싫었다. 그건 늘 해오던 방식 아닌가.

하지만 그랬으면 아까 말한대로 클라이맥스에서 더 울려줄 수 있었다. 가족을 굳이 늦게 도착시킬 이유가 있었나.
그냥 아주 무식한 이유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작가적 선택, 뭐 이런 게 아니라.(웃음) 마지막 라운드 3분이라는 시간 안에 가족들 찔찔 짜고 하는 걸 보여 주기 싫은 거다. 두 사람 싸우는 게 더 중요하니까. 그리고 라운드가 끝나고 나면 가족들하고 해소할 시간이 충분이 남아 있는데 내가 왜 금쪽같은 시간을 그들에게 배분해 줘야 하는가. 안 그래도 가족들의 반응 샷을 다 찍어놓긴 했다. 카메라 2대 돌리면서. 그런데 6라운드까지 오면 보는 사람들도 두 사람을 마치 아는 사람처럼 느끼게 될 거라 믿었다. 좀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은 ‘나도 이런 데 그걸 지켜보는 가족들 심정은 어떨까’ 하고 미루어 짐작하기를 기대한 거다.

주연과 조연을 막론하고 배우들이 다들 연기를 잘하더라. 류승범 연기가 특히 굉장히 세던데.
승범이에게 원래 그런 센 모습이 있다. 승범이의 여러 가지 면들이 영화에서 발휘될 여지가 컸는데 <화려한 시절>이라는 강력한 TV 매체의 힘을 얻은 이후로는 그냥 '양아치'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게 안타까웠다. 예를 들어 <품행제로> 라스트 신은 굉장히 서글픈 장면인데도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막 낄낄거리는 거다. 그때 난 무척 짜증이 났다. 류승범의 형이기 이전에 류승범을 좋아하는 감독으로서 그게 마치 걔의 고유한 이미지로 굳어버리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그가 갖고 있는 투지가 있으니까. 그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1]]상대적으로 최민식의 연기가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 느낌도 있는데.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는 배역이 달라질 뿐이지 그건 늘 알 파치노의 연기고 드 니로의 연기다. 대가가 된 배우들은 사람들이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배우 자체를 보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인썸니아>를 보면서 돋보기를 낀 알 파치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짠한 적 있다. 최민식은 벌써 몇십 년을 연기한 배우다. 이제는 최민식이라는 배우 개인에게 쌓이는 연륜이나 주름의 깊이를 즐겨야 한다고 본다. 최(민식) 선배에게 뭔가 획기적인 변신을 요구하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강태식이 허물어지는 순간 보이는 클로즈업은 그래도 임팩트가 세다.
똑같이 멍한 표정을 지어도 최민식의 멍한 표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얼굴 자체가 주는 힘이 있다. 클로즈업을 했을 때 그런 임팩트를 주는 배우가 정말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최 선배는 정말 훌륭한 배우다.

류승범과 최민식의 대사를 보면 톤이 다르지 않나. 류승범은 자존심이 강하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다. 최민식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무너지는 순간만 오면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잖나. 그게 나이 때문이라고 본 건가.
그것도 다 배우들의 해석이다. 수다스러운 사람과 과묵한 사람. 뻔하긴 하지만 아주 효과적인 대비 아닌가. 인터뷰하면서 그런 배우나 감독들 만났을지 모르지만 원래 한때 전성기를 가진 나이든 패배자들이 말이 많은 법이다. 예를 들어서 강태식이 식당에서 수다를 떠는데 식당 주인 상철은 라디오를 틀어놓고 딴짓한다. 이 사람이 얘기해도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거다. 워낙에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운동으로 자기를 증명하던 사람 아니었나.

강태식 분량과 유상환 분량은 화면 톤 자체가 틀리다. 색감도 틀리고.
 결정적으로 샷 분할 방식이 틀리다. 상환의 분량은 카메라 배치가 되게 다양하다. 그건 컷 단위로, 샷 단위로 연기했다는 뜻이다. 조명도 세밀하게 설계하고. 최 선배가 농담처럼 그랬다. 상환 분량 보면서 얜 조명도 잘 쳐주면서 난 말이야 만날 길거리에서 찍고 말이야.(웃음) 반면 태식 쪽은 마스터 샷 연기를 많이 한 거다. 두 대의 카메라를 이용해서. 그건 연기자들의 연기 스타일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다. 최민식은 긴 호흡의 연기를 할 때 다양한 에너지가 표출되는 배우다. 적어도 우리 영화에서는. 그러다 보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태식 쪽 이야기에 점프 컷들이 많다. 그 사이를 배우의 호흡으로 메우는 거다. 내 콘티 계산대로 찍은 건 상환 분량이고 태식 분량은 완전 방임형 연출을 했다. 맥주가 받는 사람이 있고 소주가 받는 사람이 있듯이 영화 연출도 감독마다 맞는 스타일이 있는 것 같다. 이번 영화의 연출 스타일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편했다. 전작들을 돌이켜보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때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돈 하고 바로 직결되니까 힘들었고, <피도 눈물도 없이> 할 때는 <죽거나…> 팀이 다시 뭉쳐서 하니까 모두 의욕이 넘쳐서, 우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흥분에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서 힘들었고,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할 때는 기술적으로 끊임없이 뭘 만들어내야 하는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가령 서른 컷을 준비하고 나갔는데 한 10컷밖에 못 찍었다 해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한 거다. 처음엔 내게 안 좋은 습관이 배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가만 보면 그런 것 같진 않고. 이게 <주먹이 운다> 현장이기 때문에 생기는 특성인지 아니면 내가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다음 영화 찍어봐야 알 것 같다. 그때 다시 옛날 성격 나올지도 모르지.(웃음)

시나리오와 실제 장면이 다른 게 많다. 시나리오는 얼마나 고쳐썼나?
시나리오를 많이 고치는 편이라 한 20번쯤 되나? 쓸 때마다 달라진다. 찍을 땐 또 달라지고. 원래 시나리오 뼈대는 한 사람이 50분 나오면, 그 다음 사람이 50분 나오는 버전이었으니까. 그러면 아무래도 관객들이 결말에 가깝게 있는 사건에 몰입이 더 잘되니까 바꾼 거다. 하지만 이야기를 교차하는 수법도 낡은 수법이라 어떻게든 새로운 걸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 <주먹이 운다>vol 1, 2로 나누자는 고민도 심각하게 했었다. 그런데 그건 더 위험한 방식이었다. 그러면 또 타란티노 따라했다고 그럴 거 아닌가. 누구 따라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이 영화하는 건데.

아직도 그런 강박이 있나보 다. 이젠 무시할 때도 됐는데.
완전히 무시야 못하지. 하지만 어느 정도 맷집은 생겼다. 감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내 변화 속도를 못 따라오는 것 같다. 자꾸 나를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정말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느 감독이든 다음 영화가 최악의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최고의 영화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내일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예전에 말도 안 되는 엉성한 전쟁영화 찍던 사람이 <미스틱 리버> 찍지 않나. 이제 내 나이 서른셋이다.

[[3]]자신감으로 충만해 보인다.
솔직히 자신감이 많은 건 아니고 아쉬움이 없을 뿐이다. 가령 이성에게 프러포즈할 때 대부분 작전을 많이 세우다 결국엔 단순하게 해버리지 않나. '매일 아침에 네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어' 뭐 이런 멘트 준비했다가 결국엔 쭈뼛쭈뼛 "사랑해" 하고 툭 뱉어버리리는 식으로. 그렇게 일단 내 진담을 뱉고 나면 '에이,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나한테 전화 해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이렇게 되는거 아닌가. 지금 심정이 그렇다. 그 전에는 농담을 섞어 가며 고백한 거라면 이번엔 어렵게 진담을 꺼낸 기분. 그래서 전에는 주위에서 반응이 안 좋으면 꽤나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은 '에이, 할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드는거다. 사실 난 이제 걸작에 대한 욕망이 없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성룡도 되고 싶고 버스터 기턴도 되고 싶고 샘 페킨파처럼 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 거장의 칭호를 부여받는 감독들처럼 내 영화도 그렇게 살아남았으면 하는 욕망이 예전엔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박 감독님한테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들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내가 그 사람이 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내 모습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은 거다. 전에는 솔직히 '내가 이런 영화 봐서 요건 좀 알거든?'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일종의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정식 영화 교육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는 거, 그들이 모르는 걸 난 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내가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내 영화 만들 시간도 없는데 언제 남의 영화 보겠나. 이젠 애 낳고 키우다 보니까 보고 싶어서 볼 시간이 없다.(웃음)

다행히 당신에겐 아직 시간이 많다.
내 꿈은 걸작을 만드는 게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거다. 스콜세지도 얼마 전에 그런 얘기하지 않았나. 난 이제 오스카에 목숨 걸기엔 너무 늙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 당대 최고의 영화감독이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내가 무슨. 요즘 나의 큰 변화는 영화보다 사는 게 더 중요해졌다는 거다. 내가 본 영화가 내가 만드는 영화에 녹아드는 것 보다 내 삶이 내 영화에 녹아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내가 좋아하는 어떤 영화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그 영화에서 받았던 정서적인 충격이나 흥분을 재현하는 게 더 중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 영화가 몸에 붙는모양이다. 매체를 다루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나?
오손 웰스도 <시민 케인>할 때 다 알아서 한 게 아닐 거다. 예전에 내가 느낀 혼란은 그런 거다. 감독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강박. 그래서 내가 모르는 부분을 안 들키려고 혼자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원맨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바엔 툭 까놓고 스탭한테 맡기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스탭과 배우를 고를 때 고민하는 이유가 그들의 장점을 뽑아먹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내가 못하는 부분을 해줘야 같이 일하는 의미가 있지 않나. 감독들은 원래 설명이 잘 안 되는 선택을 할 때가 많다. 예전 같으면 스탭들이 그런 선택을 약간 제어하려는 측면이 있었다면 지금은 필모그래피가 좀 쌓이다 보니 으레 그러려니 하는 측면도 있다. 나 역시 좀 더 귀를 열게 되고. 영화가 공동체 작업이라는 것에 대해서 새삼 몸으로 느끼게 됐다. 요즘 그런 변화가 좀 생긴다.

 

 [[0]]다음 영화는 액션영화라고 들었다.
완전히 장르영화다. 내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에선 완전한 악당이 없었다. 대개 선악이 불분명한 사람들의 대결이었다. 위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거다. 왠지 그래야만 진보적인 것 같고 그 세계관이 훨씬 더 위대해 보여서. 이번엔 진짜 좋은 놈 나쁜 놈 뚜렷하게 있고 저 새끼를 무너뜨려야 사건이 종결되는 그런 영화 만들어보고 싶다. <요짐보>처럼 경쾌하면서도 아주 리드미컬한 장르적 재미를 주고 싶다.

다음 영화에서는 테크니션의 면모를 보여주는 건가?
사실 이건 나만의 노하우로 갖고 있으려고 했는데 <주먹이 운다>에도 은근히 프레임 변화가 많다. 눈에 띄지 않게. 겉으로 안 보이게 했다 뿐이지 내가 시도하고 싶은 테크닉은 다 시도했다. 덕분에 우리 촬영팀이 되게 고생했다. 찍을 때마다 프레임 수를 계속 바꾸니까. 할리우드 액션영화에서는 사람들이 무겁게 떨어지는 반면 홍콩영화에서는 소품이 부서지면서 떨어지는데도 사람은 되게 가볍게 떨어지는 걸 느낄 거다. 그게 프레임 속도의 차인데 21프레임이냐 22프레임이냐의 아주 미세한 차이다. 고속 촬영도 48프레임이냐 60프레임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고. 그걸 이번 영화에서 테스트했으니 다음 영화엔 다 쏟아붓겠지.

충청도 판 <옹박>이라던데?
 그런 말 이제 안하려고. 또 <옹박> 따라한다고 그럴까봐.(웃음) 제목은 <짝패>다. 주인공들은 충청도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서도 입을 열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근사하게 폼 잡은 주인공을 카메라가 훑어 내려오면 "한번 뎀벼봐아"라고 할 때의 바로 이상해지는 그런 느낌이 재밌을 거다. 실제로 충청도 건달들이 사람을 칼로 찌르면서 '야, 그만 찔러 임마" 하면 "아 조금만 더 찌르구유" 하는 그런 살벌한 면이 있다. 이번엔 처음으로 내가 쓴 시나리오가 아니다. <혈의 누>를 쓴 이원재 작가가 초고를 썼다. 진짜 액션영화의 문법, 인물의 동작이 명확하게 보이는 영화를 찍어볼 생각이다. 액션영화의 쾌감이란 결국 배우의 동작과 편집의 느낌 아닌가.

한국에 그런 액션이 되는 배우가 있나?
있다. 누군지는 비밀이다.(웃음)

사진 서지형 기자

2005.04.04 / 김영진 편집위원, 김세윤 기자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Tv  (0) 2007.01.07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2005년 개봉작! 9월 23일(토) 방영한!  (0) 2006.09.25
홍상수의 부활!  (0) 2006.09.02
<주먹이 운다> 리뷰 (인터뷰.) 2  (0) 2005.04.12
주먹이 운다. (리뷰)  (0) 2005.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