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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운다> 리뷰 (인터뷰.) 2

사나예 2005. 4. 12.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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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곳이 없다

살아본 사람은 안다. 죽으려고 했던 사람도 안다. 인생은 숨을 곳이 없다는 걸. 대배우 최민식도 안다. 젊은 배우 류승범도 안다. 연기도 숨을 곳이 없다는 걸. 꺼지거나, 혹은 활활 태우거나.

초반부터 늘씬 얻어 맞았다. 최민식과 류승범은 ‘얄짤’이 없다. “두 분 중에 누가 먼저 울리나요?” 둥근 눈에 검은자위가 많은 최민식이 쏘아본다. “누가 먼저 울리는 게 뭐가 중요해요? <주먹이 운다>는 누구의 삶이 더 심금을 울리느냐, 누가 더 불쌍하냐 그런 게 중요한 영화가 아니에요. 나는 언론이 누가 더 먼저 울리고, 더 많이 울리고 그런 거 비교하는 게 상당히 불만이에요. 저 여기요, 음악 좀 줄여주세요.” 주변이 조용해지니 분위기 더 살벌하다. 여기선 숨을 곳이 없다. 다시 주먹을 뻗는다. “류승완 감독이 말하길, 원래 두 사람 인생을 전후반으로 보여 주다가 마지막에 링에서 만나는 걸로 구상했는데, 그런 구조에서는 앞에 나온 배우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서 교차 편집으로 가기로 했다더군요.” 이번에는 가는 눈에 흰자위가 많은 류승범이 째려본다. “유치한 발상이에요. 내가 먼저 나오면 내가 손해고, 선배가 먼저 나오면 선배가 손해고, 연기에 그런 게 어딨어요? 설령 관객이 비교하게 된다고 해도 영화는 전체적인 여운으로 남는 거지 누가 연기를 더 잘했냐로 남는 건 아니잖아요.” 휘청거리며 또 주먹을 뻗는다. “최민식 씨는 마지막 경기 장면에서 링거 투혼을 펼쳤다죠?” 둥근 눈에 검은자위가 많은 최민식과 가는 눈에 흰자위가 많은 류승범이 연달아 받아친다. “그게 무슨 투혼이에요? 배우가 몸 관리 못한 건 치욕적인 일이지.” “저도 링거 맞고 싶었습니다. 맞고 싶었는데, 여건이 따라주질 않았습니다.”

못난 놈과 어리석은 놈

사는 건 때리는 일보다 맞는 일이 많은 법이다. 그걸 알지 못하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인생’이라고 불리는 펀치 센 놈이 코너까지 두들겨패는 이야기 <주먹이 운다>도 그걸 말하려는 영화다. 영화는 강태식(최민식)이라는 못난 놈과 유상환(류승범)이라는 어리석은 놈의 못나고 어리석은 삶을 교차로 보여 주다가 못난 놈과 어리석은 놈이 신인왕전이 벌어지는 링 위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장렬하게 담는다. 못난 놈이 이긴다고 잘난 놈 되는 것도 아니고, 어리석은 놈이 이긴다고 똑똑한 놈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끝까지 싸운다. 관객은 누구도 응원할 수 없다. 다만 감동할 뿐이다.

최민식. 요즘에는 정말 짜증 나는 남자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건 <꽃 피는 봄이 오면>의 현우건, <주먹이 운다>의 강태식이건 최민식은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사는 인물을 제 것같이 연기하는데 완전히 도가 텄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복싱 은메달리스트였던 강태식은 늘 2인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콤플렉스는 2인자인데 그의 삶은 점점 꼴찌가 되어간다. 하던 사업은 망해, 와이프는 이혼하자고 해, 친구는 뒷통수쳐, 하는 일마다 꼬인다. 쥐약 먹고 콱 죽자, 강태식은 아들을 약국에 심부름 보내놓고는 아내를 보자 갑자기 본능이 불끈 솟는다. 강태식은 그런 남자다. 그러던 그가 먹고살려고 매맞으면서 돈을 번다. 남자는 1분에 1만 원, 여자는 2분에 1만 원. 인간 샌드백으로 살던 그가 나이 마흔셋에 결심을 한다. 링에 다시 오르자!

류승범. 오랫동안 양아치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품행제로> 등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싸움질만 일삼던 류승범은 <주먹이 운다>에서 커서 뭐가 될지 안 봐도 뻔한 불량 청소년 유상환을 연기했다. 류승범은 거의 완벽하게 창조적으로 유상환을 소화했다. 유상환은 앞날이 절벽이다. 폐지 모으는 할머니, 막노동하는 아버지와 영세민 아파트에 사는 유상환은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가방 끈도 짧은 녀석인데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지 사고만 치고 다닌다. 그래도 성질은 있어서 아버지에게 반말이나 해대고 피해자 부모에게 오히려 주먹질이다. 대한민국의 법무부는 그를 소년교도소로 보내는데 여기서 상환은 복싱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해왔던 주먹질과 다른 주먹질을 알게 된 그는 아버지 죄송해요, 할머니 미안해요, 하는 마음으로 링에 오른다.

거리로 나온 자과 감옥에 갇힌 자

 MBC <생방송 화제집중 6시>에 나온 하레루야 아키라와 SBS <휴먼TV 아름다운 세상>에 모습을 보인 서철에게서 각각 강태식과 유상환의 캐릭터를 따온 <주먹이 운다>는 캐릭터의 거친 생동감이 잘살아 있는 영화다. 캐릭터의 모델이 된 두 사람이 실제 권투 선수여서이기도 했지만, 권투 말고 이종격투기로 종목을 바꿔볼까 했던 류승완 감독에게 “이 나이에 두 팔 쓰는 권투도 힘들어 죽겠는데 두 다리까지 쓰라고? 그럼 난 안 해”라던 최민식의 결사 반대로 권투로 낙찰됐다는 게 류승완 감독의 농담 같은 해명이다. 사실 감독은 사각의 링 위에서 발가벗고 싸우는 남자들의 원초적인 모습에 오랫동안 판타지가 있었다. 최소한 가릴 곳만 가린 채, 최소한의 규칙으로 승패를 가리는 권투는 사나이 인생의 축소판으로 여겨졌다. 링은 숨을 곳이 없다. 도망칠 곳도 없다. 공이 울릴 때까지, 시합이 끝날 때까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텨야 한다. 아니면 KO. 인생 아웃인 것이다.

프로 복서였다 사업에 실패한 후 신주쿠 광장에서 매를 맞아 돈을 벌게 된 하레루야 아키라의 얘기를 들은 최민식은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부터 감동을 받았다. 터무니없는 자기합리화로 줄행랑 치기 바쁜 다른 실패자들과는 달리 하레루야 아키라는 광장으로 나가 맞아서 돈을 벌었다. 비참하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비루하지만 비열하지 않았다. “저런 사람을 두고 멋있는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보통 사업 망하고 부도 나면 도망가기 바쁜데 그렇게 당당하게 고난을 뚫고 나가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어요. 당장 하겠다고 했죠.” 최민식의 출연 동기는 ‘용기’와 ‘희망’이었다. 유상환의 모델이 된 서철은 천안소년교도소 수감 중 교도관의 권유로 권투를 시작, 전국체전에서 2년 연속 은메달을 딴 인물이다. 냉대를 딛고 가난한 희망을 큰 희망으로 키운 것이다. 영화와 자신이 맡을 서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류승범도 <주먹이 운다>가 마음에 들었다. “내 개인적인 과거사와 유상환이라는 인물의 배경이 닮았다고 하는데 저도 그게 얼마나 닮았는지 궁금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어제는 이 생각, 오늘은 저 생각을 끊임없이 쏟아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를 통해 삶의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어요.” 류승범의 출연 동기 역시 ‘용기’와 ‘희망’이었다. 두 배우 모두 시나리오도 안 나온 상태에서 용기있게 출연을 결정했고, 영화를 통해 희망을 보여 줄 마음에 적지 않게 들떴다. 하지만 만만한 게 아니었다
.

이것이, 인생이다

 “이걸로 먹고살 게 아닌데 아주 선수를 만들려고 해.” 류승범이 지난날을 돌이키며 하드 트레이닝의 악몽에 몸서리를 친다. 연습도 연습이지만 실전은 더 괴로웠단다. “모니터 확인하러 링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려면 정말 짜증이 났어요. 액션 사인과 함께 또 내몰리는 거예요. 물론 상대가 선배가 아니라 후배였다면 좀 편했겠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니까 나 역시 인간적으로 어쩔 수가 없어요. 덜 맞으려면 피해야 하고, 안 맞으려면 때려야 하고. 영화 속에서는 ‘공’과의 싸움이지만, 찍으면서는 ‘컷’과의 싸움이었죠.” 류승범이 날린 펀치에 갈비뼈에 금이 간 최민식도 고생이 많았다. “이렇게 나왔던 배가 쑥 들어갔어요. 그렇게 혹독하게 했는데 안 들어가고 배겨? 찍고 나니까 개운한데 그때는 도살장 끌려가는 것 같았어요. 승범이한테 몇 번 얻어맞으니까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구나, 정신이 팍 나더라고요.” 류승범은 재촬영이 없다는 통보에 쾌재를 불렀지만, 최민식은 “촬영이 끝나니까, 이제부터 다시 찍으면 더 잘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유상환과 강태식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제 막 권투 선수가 된 유상환은 빨리 이기고 싶은 욕심이 간절한 신인 복서고, 늦은 나이에 링에 다시 오른 강태식은 링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한 퇴물 복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싸웠고, 누군가는 경기에서 이겼고, 따지고 보면 뼛속 깊이 패배감에 차 있던 인생에서 각자 승리를 거뒀다. 깊고 검은 눈동자로 망연자실한 가장을 표현했던 최민식과 흰자위를 굴리며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는 청년을 연기했던 류승범의 표정은 링에 올라 처절하고 아름다운 야수의 표정이 되었다. 앗, 엇, 헉, 켁, 강태식과 유상환이 아니라 최민식과 류승범이 씩씩거리면서 토할 수밖에 없던 짧은 신음은 <주먹이 운다>의 어떤 대사보다도 찌릿하게 가슴을 후빈다. 지푸라기는 심정으로 잡는 게 아니더라. 발버둥은 발로만 치는 게 아니더라. 짧고 굵게 사는 멋진 인생? 웃기라 그래. 가늘고 길게,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할 때까지 사는 인생 막장이 그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야. 연기 대결, 링거 투혼, 이런 말들을 무지 싫어하는 존경하는 선배와 무시무시한 후배는 상생의 호흡으로 글러브 속에 우는 네 개의 주먹을 보여줬다.

시사회에서 <주먹이 운다>를 보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을 탔다. 꼬부랑 할머니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리를 양보해야 되는가 싶어 순간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는 그게 아니라며 껌 몇 통을 쥔 손바닥을 내밀었다. 껌을 사야 되는가 싶어 지갑을 꺼냈는데 천 원짜리를 준다는 게 만 원짜리를 주게 됐다. 할머니는 좋아서 연신 굽신거리신다. 할머니가 지나가고 난 후, 옆에 앉은 아줌마가 “저런 할머니들은 젊은 사람들만 노린다니까”하며 이죽거린다. 아줌마가 <주먹이 운다>를 봤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구걸이 비루해도, 삶은 비루하지 않다. 숨지 않으면, 숭고하다. 이것이, 인생이다.

사진 변순철

2005.03.30 / 한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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