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주먹이 운다. (리뷰)

사나예 2005. 4. 12. 02:04
주먹이 운다 (2005)
 Crying Fist
 감독 류승완
 주연 최민식, 류승범
 관람등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2005.04.01
 장르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바로가기
 제작국가 한국
  리뷰, 관련기사
마침내 목적지를 찾은 류승완

인간 내면으로 접근한 성숙한 시선과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가족주의를 영화 속으로 끌어온다

류승완은 사실 다소 과대 평가된 감독이었다. 그는 세 편의 16mm 단편을 이어 붙여 (본인의 표현을 빌면) ‘야매로’ 장편영화를 완성했고 그것을 극장에 걸어 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후로 줄곧 재능 있는 감독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데뷔작 이후에 연출한 두 편의 영화는 실망스러웠고, 냉정하게 되돌아보면 데뷔작에 쏟아졌던 찬사도 이 입지전적인 감독과 ‘야매로 완성된’ 저예산 영화에 다소 너그러운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대중들에게 만족스럽게 소비된 액션영화도 아니었고 딱히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낸 작품도 아니었다. 단지 ‘독립영화’에서 ‘상업 영화’로 전례 없이, 그리고 기적적으로 변신한 작품에 불과했다. 적어도 나는 류승완에게서 그 이상의 의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한 편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놓은 적 없는 그에게 언론이나 평자들이 줄곧 주목해온 광경은 과대 평가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 자신도 그가 새 영화를 크랭크업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음을 인정해야겠다).

그런데 류승완의 새 영화 <주먹이 운다>를 보고 난 후 앞서 언급한 판단이 성급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우리는 류승완에게서 혁신적인 결과물을 들고 나타날 것을 기대했고, 그는 지금까지 그 기대에 절반 정도만 부응했다.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겠지만 여태껏 그는 미완의 기대주였다. 그의 영화 곳곳에서 많은 재능을 엿볼 수 있었지만 어쨌든 게임에서 이긴 적 없는 유망주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에게는 나처럼 의심 많은 평자나 관객들을 설복시킬 만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런데 결국 <주먹이 운다>에서 그 ‘한 방’이 터져버렸다. 이 영화는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허술하고 불안하게 유지돼 온 류승완의 세계가 완결성을 얻고, 그가 이제 비로소 관객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문법 체계를 확립했음을 알리는 작품이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상상력의 퇴행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공중에 부유하던 류승완의 세계가 땅위에 능숙하게 착지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진화다.

어느 저명한 문학 평론가는 “원초 체험의 시대가 가고 텍스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천명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의 예로서 우리는 류승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는 기호를 인위적으로 조합하여 텍스트를 짜내는 감독이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는 인간사의 구체적인 풍경을 화면에 담거나, 삶의 이면을 노출시키거나, 보편적인 상상력을 작동시켜 환상의 세계를 제시하는 영화의 기본적인 본령에 무관심해왔다. 그는 자신의 영화적인(또는 문화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관이나 만화 가게에서 보고, 듣고, 읽은 것을 조합하여 마치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창조해낸 양 태연하게 자신의 서명을 덧붙이는 감독이었다(이러한 부류의 대표 주자로 <킬빌>을 연출한 쿠엔틴 타란티노를 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영화에서 성룡으로부터, 쿠엔틴 타란티노에 이르는 수많은 참고 문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소위 말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에 우리가 가장 주목할 만한 창작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론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서 인물들이 이름 대신 ‘미스터 오렌지’, ‘미스터 핑크’ 등으로 불리고, <킬빌>에서는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주인공을 보는 내내 이소룡이 눈앞에 어른거리듯이, 대중문화의 기호로 조합된 인물들은 인간적인 질감으로 우리와 접촉하지 못하고 단지 현란한 기호로만 감지될 뿐이다. 즉 그 인물들은 ‘자연인’이 아닌 ‘인조 인간’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류승완의 영화가 안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의 영화에 자연스런 인격을 갖춘 인간이 등장하지 않고, 그의 카메라가 인물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주차장에서 두 인물이 싸우는 장면만 거의 내내 보여 주고 류승완은 훌륭한 몸동작을 선보이는 데 만족한다. 물론 난데없이 삽입되는 인터뷰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인물들에게 가까이 접근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영화에서 두 인물을 배우가 아닌 엑스트라로 대체해도 무방해 보인다. <아라한 장풍대작전>도 마루치 아라치 이야기에 무협 만화의 코드를 섞어 볼록 거울에 비추어 전시한 텍스트여서 영화 속에서 관객들이 들어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우리는 그의 영화에서 깊이 공감할 만한 자연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류승완은 오로지 텍스트를 조합하고 조작하는 유희에만 몰두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주먹이 운다>에서 가장 고무적인 점은 류승완이 대중문화 소비자로서의 감수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인간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응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물론 이는 이 영화가 하레루야 아키라와 서철이라는 두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는 앞날이 절망적인 두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였던 강태식은 재산을 모두 날리고 길바닥에 나앉을 지경에 이르자 길거리에서 돈을 받고 매 맞는 일을 하게 된다. 또 한 명의 막장 인생 유상환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돈을 구하려다 사고를 쳐 소년원에 수감된다. 이 두 인물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데,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권투라는 구원의 밧줄이 내려진다. 이 밧줄이 정말 그들을 구원할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이들에게 남은 것은 권투뿐이고 그들은 신인왕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류승완은 처음으로 이 영화에서 가슴을 열고 관객들에게 대화를 청한다. 이제까지 그는 자신이 예전의 영화 속에서 봤던 장면이 훌륭하지 않느냐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영화광이었지만 이 영화에서 그러한 문화 소비자로서의 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밑바닥까지 내려간 두 인물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이처럼 류승완이 관객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가 너무 순순히 장르의 문법에 투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에 이르도록 두 주인공은 만나지 않고, 관객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두 주인공이 ‘불행하게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맞붙게 된다. 영화 내내 한번도 마주치치 않은 두 주인공이 태연하게 서로를 모른다는 듯이 결승에서 맞붙는 장면은 심지어 코믹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감동적인 한,일 축구 경기가 아니라, 올림픽 탁구 결승 경기에서 한국 선수 두 명이 맞붙는 상황이다. 관객들로서는 어쨌든 절반의 승리밖에 거두지 못하는 게임인 것이다. 류승완은 이처럼 영화를 결국은 예정된 방식으로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가면서 영민하게도 아군과 적을 명확하게 구분해 응원단을 몰아주는 관습적인 ‘반칙’은 구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결승전에서 우리는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지만, 결국은 둘 다 승리한다. 영화 속에서 태식과 상환은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둘 다 반칙을 할 줄 몰라 인생에서 실패한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룰이 지켜지는 링 위에서 힘을 얻어 승리하게 되고, 심지어 감독도 반칙 없이 해피 엔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가족을 해체시키며 관객들을 자극하고, 이어 가족 구성원 간에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인력(引力)을 통해 화해를 이끌어낸다. 태식은 가장으로서 실패한 아버지고, 상환은 가족들에게 실망스러운 자식이었다. 소년원에서 잠시 외출한 상환은 할머니가 몸져누운 병원으로 찾아가는데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옆에서 간병인이 “외국으로 가서 크게 성공했다고 할머니가 자랑하던 손자가 왔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은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다. 그리고여기서 신인왕전은 보다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주인공들은 어쩌면 아버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뒤늦게나마 아들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붓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류승완의 영화에서 온전한 가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에 관한 언급을 무의식 중에 피해가기 위해 상상과 액션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는 추측마저 가능케 하는데, 이 영화는 이처럼 가족주의를 정면으로 응시하여 삶의 내밀한 감정을 들춰내는 데 성공하였다.

<주먹이 운다>는 인간 내면으로 접근한 성숙한 시선과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약간은 퇴행적으로 보이는 가족주의적 제스처가 뒤섞인 채로 태어난 작품이다. 어쨌든 결과는 성공적이다. 감독이 기본 스텝을 충실히 연습하여 기존의 변칙적인 스타일에 기본기를 자연스럽게 융화시켰다는 인상을 이 영화로부터 받을 수 있다. 류승범의 연기도 이 영화에서 크게 한걸음 내디뎌 최민식의 무게감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교차 편집으로 번갈에 등장하는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영화는 관객들을 충분히 즐겁게 자극한다.

2005.04.04 / 문일평(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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