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 이론과 비평

〈나를 다 안다는 착각〉

사나예 2023. 3. 11. 01:56

리학 책을 요즘 여러권 읽었다. 인간의 심리를 다루기에 묵직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생각보다 무겁거나 어렵진 않았다.

지금 읽은 책은 1952년 발표작으로 고전에 속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이 책은 정신분석학자로 불리는 카렌 호나이의 <나를 다 안다는 착각>.

주지할 것은 저자가 여성 학자라는 점이다.

 

정신분석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프로이트를 비롯해 이 분야에서는 언제나 남성학자들이 주류였다. 칼 융, 알프레드 아들러, 에리히 프롬까지.

저자인 카렌 호나이는 독일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정통파로, 여성으로써 정신분석학에 뛰어든 선구자였다고 한다.

 

기존의 「정신분석」이 지나치게 남성 편향적인 관점이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학계에서 파란을 일으켰다는 카렌 호나이.

그는 자신만의 깊은 고찰과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책을 펴냈다.

 

카렌은 환자(내담자)와 분석자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해야 치료가 수월함을 먼저 전제한다. 분석가 입장에서는 환자가 ‘치료’작업에 협조적일 때 더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저자는 분석가의 역할을 이렇게 단언했다.

 

치료 과정을 산행 山行에 비유하며, 등반하는 이가 어떤 방향을 선택할지와 

어디를 피해야할 지를 안내해 주는 사람이 분석가라는 것.

구체적인 선택과 행동을 강요하는 게 아닌 방향을 조언하는 일이 분석가의 역할이라는 이 표현이 와 닿았다.

 

환자의 정신 활동에 무엇이 걸림돌인지를 알려주어 그걸 치우도록 돕고,

지쳐서 낙담한 환자에게는 의욕을 충분히 끌어내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

자신의 내면을 바르게 통찰하는 것을 진전시키는 치료』가 의사, 분석자의 일이다.

 

일부 책들 중에 자기 인식/분석이 쉬운 일이라고 단언하는 책들이 있음을 저자는 비판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일이 쉽다는 주장은 착각이며, 낙관적인 신념이라고 한다. 심지어 해로운 착각이라고까지 꼬집는다.

자기 인식은 홀로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이고, 더딘 과정이며, 때로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움이 동반된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에 지레 체념하는 태도도 안 될 일이다.

요컨대 작가는, 정신분석가와 환자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한 바른 자기 분석을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의 깊은 곳, 어두운 곳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그저 묻어두었던 감정들,

억압된 생각들은 불안, 강박, 분노, 우울 등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정신의학 전문가는 이를 끄집어내게 하는 과정을 통하여 환자의 치료를 돕는다.

이 과정이 편안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고통, 혼란을 겪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이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과정에는 피할 수 없는 충격과 고통 속으로 퇴보할 수밖에 없다. 건설적인 과정이라면 어디에나 따르는 현상”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잠재의식을 중요하게 다루는 분야다.

인간이 주변 세계와 맺는 만족스러운 관계를 파괴하는 행동, 감정, 반응이 무의식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치료를 하러 찾아오는 이들은 모두 ‘문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책에서 무의식을 나쁘게 바라보지만, 물론 좋은 의미의 무의식도 존재한다.

병원을 찾아올 이유가 하등 없는 것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게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고 무언가에 헌신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동기가 무의식에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공을 하고 성취를 했음에도 여전히 공허해 하고, 불만스럽다면,

내 딴에는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번번히 실패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인 요인들을 탐구할 때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면의 무언가가 우리가 추구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 같다면 무의식적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

 

이 책에 따르면 ‘혐오해’라고 편리하게 내뱉는 말도 멘탈 질환에 속한다.

물론 ‘나치를 혐오한다’거나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을 혐오한다’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성별, 나이, 국적, 인종, 신분, 신념 같은 것에서 특정한 ‘무리’를

쉽게 혐오한다고 하는 표현을 우리는 쉽게 접할 수 있지 않나?

그런 표현을 비일비재하게 접하다 보니 어느샌가 무뎌지고 둔해진 자신을 깨닫고 놀랐다.

 

이런 무차별적인 혐오의 언어, 행동은 정신분석학자가 보기에 신경증적인 욕구의 표출에 해당한다.

결코 평범한 게 아니고, 고쳐져야 자신도 타인도 건강해진다고 말하는 작가.

 

저자가 10가지로 신경증적 욕구를 제시하는데 이게 무척 시대를 앞서갔다.

지금 나오는 ‘갑질’ ‘분노조절 장애’ ‘가스 라이팅’ ‘관종’ 이런 말은 없지만

모두 현 시대의 정신증적인 증후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어서 소름 돋았다.

 

내가 프로이트 학설에 불편함을 느꼈던 이유를 이 책에서 명쾌하게 찾았다.

과도한 단순화, 과격한 일반화. 이 점이었다. 어떠어떠한 문제의 이유는 유년기의 무엇에 있었다,는 이론을 완전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느낌들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작가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따르다가 그 맹점을 발견하고 학계에서 지적을 했다가 학파에서 제명을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용기있는 케렌 호나이가 참 존경스러워졌고, 그게 만용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 연구로 이어지고 있음을 책으로 알게 되었다.

 

정신분석의 목적은 분석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저자의 말이 명쾌했다.

분석을 통해 심리를 치료하는 게 목표이고, 심리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갈등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내가 스스로 무엇과 갈등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며,

외부에서 발견할 수 없기에 무의식을 탐험하는 작업이 정신 분석이다.

 

어떤 ‘감정’에도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자존감을 가지라고 하는데 이는 우월감으로 변질될 수 있고,

겸손이 좋은 거라고 하지만 자신을 탓하는 강박적인 겸손도 있다는 것이다.

 

옳은 말을 잘 하고 지적질에 능한 사람이 똑똑해 보이지만 이 사람은 병적인 우월감을 감추고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에도 반기를 들지 않고, 충돌은 극구 피하는 게 겸손 같지만

알고보면 자기 가치를 모르고, 자학에 빠져있을 수 있다는 것.

 

정신분석의 한 방법이자 도구로 ‘자기 연상’ 글 적기가 있다.

자기에 대한 생각을 기탄없이 쓰게 하는 치료법이다.

글쓰기에는 언제나 유용한 면이 있어서 정신 분석, 치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치료 로써의 글쓰기야말로 자신에게 정말 정직해야 함을 작가는 강조한다.

의사에게 보이기 위해 가식이나 위선으로 써서는 안되고, 그 누구도 의식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자기 연상 글쓰기 이다.

 

이건 치료의 방편이었는데 뜻밖에 SNS와 블로그에 대한 의견으로 지금 내게 읽혔다. 1952년에는 인터넷도 없었건만.

 

가까운 이와의 관계에서 ‘병적인 의존’이나 반대로 ‘병적인 지배’의 관계를 작가는 한 내담자와의 깊고 치밀한 치료를 통해서 책에 풀어냈다.

그 여성의 이야기는 (출판 동의를 받은 것임) 왠만한 소설, 드라마 한편과 같아서 진한 몰입과 감동을 주었다.

 

집착과 의존도, 군림이나 지배도 나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분석을 읽으면서, 몇 차례 뜨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 맺었던 관계들에서 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제대로 인지하고 넘어가지 못했음을 책으로 느꼈다.

부지불식간에 독서를 하면서 나는 치료를 하고 있었나 보다.

 

책의 후반부는 ‘스스로 자기 분석을 하려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학문적인 지식들이었다.

『자기 분석을 하는 삶은 과학적 걸작을 만들고자 하는 대신 자신의 해석이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한다.

단순하게 자신의 주의를 끌고, 자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 내면에 감정적인 화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뒤따라가야 한다.』 273쪽

 

이 책이 1950년대에 쓰여졌는데 몹시 설득력을 주어서 놀랐다. 그 동안에 읽은 ‘정신분석’ 분야의 책 중에 가장 수긍하면서 읽은 도서이다.

오래 전 집필이어서가 아니라, 무척 진지하고 과학적이기에 한번 읽기로만은 부족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어떤 궁금증이 생길 때 자주 펴보고 싶은 책이었다.

 

극심한 고통, 불만, 피로, 짜증, 우유부단함, 걱정을 느끼면서도 그 상태를 

명확히 밝히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 일은 매우 경계해야 한다. (299쪽)

 

 

만약 우리가 성장이라는 이상을 갖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 이상에 따르는 노력을 포기하거나 심지어 독선적인 자기만족으로 노력을 억누른다면 그건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성이 부족한 셈이 된다. (320쪽)

 

삶이 순탄하게 돌아가고 특별히 도전하는 게 없다면 긴장을 풀고 싶은 유혹은 커진다. 자연히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완전한 자기 인식을 이루려는 열정이 줄어든다. 우리가 스스로 더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흔드는, 자신에 대한 건설적인 불만에 얼마나 높은 가치를 두는지는 개인의 인생철학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이 정확히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21쪽)

 

분석이 더 명료해질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자유를 더 많이 얻을수록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

삶은 투쟁이고 노력이며 발전이자 성장이다. 분석은 이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성취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력하는 것 자체에도 가치가 있다.

괴테가 말했듯이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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