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세

소설 <세계의 끝 바다의 맛> 이누도 잇신

사나예 2020. 1. 10. 06:45



 



 

영화감독 출신인 이누도 잇신이 처음으로 소설을 썼다.

<세계의 끝 바다의 맛>은 일본의 연극계의 사람들을 다루는 장편소설이다.

감독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하는데 연기자에 대한 공통분모가 있어서 몰입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인공 카몬의 시점으로 살펴보는 연극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잔잔히 펼쳐진다.

 

카몬은 배우 매니지먼트를 하는 기획사이자 극단인 자유연기의 시니어 총괄 매니저이다.

자신이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활동했지만 서른여섯에 그만둔 이후로, 매니저로 전향했다

한편 2년차 직원 나카무라는 카몬의 직속 부하이다. 안정되고 잘나가는 광고회사에서 일하다가 어느날 불현듯자신이 연극을 사랑하는 걸 깨닫고 극단 자유연기에 입사했다.

 

 

아니 이런 내용이 이렇게 스릴 있을 일인가?

 

카몬과 나카무라를 중심으로 연극인들을 그려가던 소설은, 중반부를 통과하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내달린다.

근데 그 사건이란 것도 무슨 살인사건 같은 범죄거나, 뉴스를 발칵 뒤집는 그런 일이 전혀 아니다.

 

 

도쿄 시부야에서는 매년 10~12월 두 달동안 신작 페스티발연극 공연을 연다.

신예 극작가부터 중견, 거장까지 극작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행사이다.

이제 한달반을 남겨두고 있었고 카몬의 자유연기에서도 배우와 관련해 라인업을 갖고 있었다.

 

이때 한 중견작가가 사망을 했다. 그의 대본이 완성되지 못했기에 연극 제작이 취소가 됐다.

해당 연출 감독은 대체할 극작가를 찾다가 지금은 은퇴하다시피 두문불출하고 있는 도야마 히카루를 떠올린다.

도야마 히카루는 연극계에서 한때 전설이라고 불렸는데 절필을 하고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카몬은 나카무라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도야마를 찾아가서 섭외를 하고 설득을 해서 마침내 계약을 하는데 성공했다.

 

연극계는 들썩인다. 비록 오랫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도야마 히카루가 컴백을 한다고 하니 모두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불안점이 있었다. 예전에 도야마 히카루는 공연에 임박하게 원고를 탈고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대본을 완성하고는 했고 한번은 완성하지 못해서, 예매한 관객들에게 환불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세계의 끝 바다의 맛>은 도야마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40년전의 1972년으로 거슬러 가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를 통해서 일본의 연극계의 자세한 내막과, 창작을 향해 열정을 불태우는 연극인들을 자연스럽게 묘사해 간다.

 

 

일본 영화에 대해서만 약간 알던 나는 연극계의 이야기를 듣는 게 새롭고 신기했다.

가끔 일드를 보면서 기무라 타쿠야, 마츠 다카코, 다케나카 나오토, 쿠니무라 준 등의 연기에 감탄했다.

일본 배우들도 연극을 통해서 훈련되고 그 안에서 치열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은 한 극작가가 필생의 작품을 쓰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절정으로 향한다.

매우 전문적인 세계이고 생소할 수도 있는 극작가 이야기인데,

이누도 잇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너무도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도야마 히카루가 <나의 친구 세카이에게> 작품을 거의 다 써가는데 3막을 쓰지 못하면서 연극 제작이 위태로워진다.

 

정말 이런 스토리가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할 줄 미처 몰랐다.

 

은퇴했다가 다시 나온 한 극작가, 그가 새로 발표하는 대본,

그 대본의 끝인 마지막 3.

3막을 진심으로 쓸 자신이 없어서 계약 해고까지 이르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제작발표회를 앞둔 마지노선, 마감일 앞에서 한 막 정도야 어떻게 얼버무리듯이 쓸 수도 있었던 작가.

하지만 도야마 히카루는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면 완성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포기를 하기로 한다.

 

소설에서 더 감동을 배가하는 건, 나카무라와 카몬의 태도와 마음이었다.

 

재능이 없다고 판단해서 오래전에 배우를 그만두고 매니지먼트를 하는 카몬.

도야마 히카루의 작품을 사랑해서 그를 어떻게든지 돕고 싶은 신입 나카무라.

 

둘은 극작가가 고뇌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각자의 마음속에서 연극과 창작에 대한 불씨가 지펴지는 걸 경험한다.

그래서 제작자들이 도야마를 해고하고 오라는 최후통첩을 했을 때

나카야마는 하루만 딱 하루만시간을 달라고 간청을 한다.

 

도야마 히카루는 더 이상의 신념이 소진되어서 3막을 못쓴다고 포기선언을,

카몬과 나카무라 앞에서 한다.

그런데 나카무라의 어떤, 사소하지만 배려있고 재치있는 행동을 통해서 극작가는 마음을 돌린다.

써야겠어.” 카몬과 나카무라에게 말하는 도야마.

쓸 수 있어.”

 

 

대본 한 편이 뭐라고, 이처럼 소동극이 벌어질 수 있을까.

 

<세계의 끝 바다의 맛>은 한 극작가의 처절한 안간힘과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글은 혼자 쓰는 거지만, 같이 일하는 극단 직원들이 극작가의 마음을 이해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됨을 알려준다.

 

 

 

연극의 대본을 쓰는 일을 통해서

창작과 글 쓰는 것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었다.

 

연극과 글쓰기. 모두 아날로그적인 예술 행위이다.

소설은, 이 아날로그적인 창작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인생사를 비유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의 대사,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

극중 주인공들이 일생동안 감동받은 연극, 영화 속 대사. 이들을 인용하면서

예술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고찰하고 있다.

 

 

이누도 잇신의 세계와 만난다면 당연히 신작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뜻밖에 멋진 소설로 재회할지 몰랐다.

오래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면서 츠마부키 사토시의 오열씬에 심쿵했던 기억을 소환한다.

 

아시아 영화에서 주인공 남자가 엉엉 우는 장면을 가슴에 간직한 두 편이 있다.

양조위가 나왔던 홍콩영화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다른 매체이지만 이누도 잇신이라는 거장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아름다운 소설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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