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세

달려가노라

사나예 2019. 7. 20. 02:35

 

 

지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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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을의 교토는 아름답다는 말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오랫동안 국가의 수도였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도(古都)는 전국에서는 물론 교토의 미를 알기 위해 해외의 여행객들도 속속 방문하고 있었다. 도착하여 일을 진행하고 이튿째 날 아침, 채한에게서 교토역에 도착했다 전화를 받았다.

 

호텔 체크아웃을 부랴부랴 하고 교토 역사로 마중을 하러 갔다. 아톰 동상 근처에서 뻘줌하게 서있는 채한을 광장 끝에서 찾았는데 호기심이 발동해 연락하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다가갔다. 놀래켜 주고 싶은데 과연 되려나?

 

몇 미터 남기고 채한이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오하이요고자이마스!”

“잘 왔어.”

“일은 잘 했어요?”

“그럼.”

“아야코 누나, 오늘 더 예뻐 보여요!”

그가 진심을 담아 말한다.

“됐어, 왠 립 서비스야!”라 퉁쳤으나 사실 멀리서 그를 주시하면서 쟤가 저렇게 괜찮게 생긴 애였나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단 건 몰랐길 바랬다.

 

마성의 금각사를 거쳐 통상적인 루트를 따라 관광길을 순례하다 은각사로 들어갔다.

“아야코상, 솔직히 전 일본 사찰에서 그렇게 매력을 못 느끼겠어요. 웅장하고, 신성하고, 게다가 여기는 사람들까지 많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가 머리를 긁적인다.

“처음 와서 눈도장 찍고 홱 지나가고 그러니까 그럴거야.”

지도를 보며 걷던 채한은 “제 눈이 저렴해서 그럴지도. 여기가 저기같고 비슷비슷해요. 어떡해.” 한다.

 

서걱서걱 발소리를 내며 고운 자갈이 깔린 길을 한참 걷다 그가 본인답지 않게 수줍어하면서 넌지시 말했다.

“우리 손 좀 어떻게 해야하지 않을까요? 남들이 소개팅나와 처음으로 같이 여행온 커플로 볼 거 같아요.”

나는 같이 소리를 낮게 하여 “왜 목소리를 속삭이는데?”하곤 작게 웃었다.

 

고요하고 아늑한 정원을 걸으며 무심함을 가장하여 한껏 시크하게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어색하긴 하다.. 그러면 오사카에서 친한 동네 누나가 동생 손 잡아줘 볼까?”

 

도저히 허전하게 걸을 수가 없는 길에 이르러 오른쪽에서 함께 오던 채한의 왼손을 먼저 꽉 잡았다.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 물리력 때문에 온 몸에 전기가 저릿하게 왔다.

“어? 누나 얼굴 빨개졌어.”

“너무 네가 세서.”

그가 내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는 동작이 슬로우 모션으로 눈 앞에 보였다.

손등에 키스를 하고 나더니 내리고는 다른 손으로 머리를 토닥였다.

“귀여워요.”

 

어색함 방지를 위한 우리의 손잡음이 계속되니 그것이 날 어색하게 만들었다.

“나 손에 땀나는 체질이라 친구랑도 겨울에만 가끔 잡는 사람인데.”

“그래요? 몸이 무슨 문제가 있나 봐요. 한약 멕여야겠다.” 딴소리다.

“그렇다고 팔짱은 더 오글거려 할 거죠? 그럼 저기까지만 이대로 걸어요.” 같이 걸으니 이내 그것에 또 적응됐는데, 다행히 전방으로 선물가게가 있고 사람들이 밀집해있는 데가 보였다.

 

인적이 드문 작고 정교한 암자에 도착했을 때였다.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채한이 나를 잡아채 정자로 데리고 갔다.

“여기는 딴 세상처럼 평온해 보여요. 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요.”

그랬구나….

“놀란 표정 감추려고 하지 마요, 누나.” 그가 핀잔주었다.

“아, 미안해. 내가 잘 모르는 게 많아서. 나이만 들었지.”

“사진만 보다가, 엄마 기억이 없는데, 열 살 됐을 때 아빠가 어떤 아줌마를 데려오더니 이 분이 네 엄마라고 해서 그 때 처음 만났어요.”

“사춘기가 많이 힘들었어?”

“누구나 사춘기는 질풍노도잖아요. 저라고 뭐 특별했겠어요. 많이 외로움을 타긴 했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다 받으며 잘 자란 친구들과 근본적으로 난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열아홉살까지 지냈죠.”

 

“너를 안 지 길지 않지만, 너는 누구보다 사랑받고 성장한 사람으로 느껴졌어.”

그가 예고없이 왼손을 덥석 잡더니 “이거 감동의 물결인데?!”하며 얼굴을 코앞으로 갖다 대는 바람에 눈 앞에 그의 얼굴만이 가득찼다.

뻣뻣하게 정지한 나는 사팔눈이 되어 “진심이야.” 하곤 그에게 위로를 전해주고 싶었다.

 

다시 숲길을 산책로로 접어들며 말을 잇는 채한.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여기 삼촌이 계셔서 오사카예술대학교에 편입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유독 삼촌이 절 예뻐해주셨고 몇 번 놀러온 일본이 인상이 좋았거든요.”

 

나는 그와는 삶이 달랐지만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서 그에게 차분히 말했다.

 

“일본이라고 특별히 더 좋을 건 없어. 나도 여전히 내가 진짜로 바라는 게 뭔지 모르겠는걸. 위험한 건 피하고, 남들 사는대로 적당히 관리하면서, 죽을 때까지 열정과는 담쌓고 그렇게 살다 갈지도 몰라.”

 

“저런. 몰랐는데 아야코씨 되게 비관적인 구석이 있군요? 그러지 마요. 저같은 아무 생각없는 애도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걸로 희망을 가지세요, 누나.”

 

나는 힘없이 그에게 웃음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고백의 시간같아서. 10년전에 바보같이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는데 괜히 억울해져서,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대로 따라했지. 칼로 손목을 그었는데, 칼이 녹슬었고 그었다기보다 그냥 스크래치 수준만 내며 어설프게 상처를 입혔나봐.”

 

“누나....!!”

그가 미간을 한가득 찌푸리면서 상상하는 듯 괴로운 표정이 눈에 가득찼다.

 

*

본의 아니게 무거운 얘기를 나눈 둘은 서로 각자의 생각이 깊어진 채로 교토역에 도착했다. 기차안에서 그가 내 어깨를 감싸잡더니 눈을 크게 뜨며 당부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그 얘기는 끝내는 걸로 해요, 누구한테도.

그리고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말기로 약속해요, 알았죠?”

 

나는 강제로 그의 팔을 빼며 “아직 아픔이 있었다면 안 지 세 달 된 외국인 남자한테 털어놓지도 않았네요, 이 사람아.” 응수한다.

진심이었다.

 

신칸센 열차가 플랫폼을 스르륵 떠났다.

“넌 이제…괜찮아?”

애매하게 물어본다.

“뭐가요? 아까 청소년때 얘기요?” 심드렁한 듯 되묻는 아이.

“어, 그런 거랑 이것저것 다….”

“교토 여행 같이 하게 돼서 그걸로 충분해요! 누나의 진짜 삶을 공유하게 된 것 같아 더 가까워진 거 같아요.”

“내 진짜 삶은 여전히 비밀스러워, 채한아.”

“푸하하. 앞으로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아!”

 

기차 바깥으로 평화로운 도시의 풍경들이 어둑어둑한 저녁 노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Epilogue 편지 take Ⅱ>

 

오사카로 돌아와 얼마가 지난 즈음, 채한이 홋카이도로 열흘간 여행을 떠난다며 방송국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갖고 싶은 거 없냐 묻는 그에게 ‘심심하면 엽서나 띄워달’라면서 이래뵈도 낭만적인 여자라고 외쳤다.

고전적이라더니 주소를 적어간 그에게서 일주일 후 아담한 글씨체의 엽서가 도착했다.

 

삿포로 밤 풍경이 환상적으로 찍힌 한 면을 뒤집으니, 짧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소설에서 읽은 건데요.

살면서 때로는 무모한 용기를 낼 때도 필요하대요.

20초면 되요.

관심을 갖고 있는 일,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시도하고 고백하는 거에요. 그러면 전보다 훨씬 멋진 일이 펼쳐질 거라고.”

 

더 이상 주저하거나 겁내지 않도록 격려하는 누군가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믿을 수 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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