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 도서관 서가를 거닐면서 소설 코너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와 우리나라의 소설가가 진짜 많구나.
저렇게 무수한 소설들을 사람들은 얼마나 읽고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도서관에 서점에 진열되어 있어도 누군가 찾지 않으면 그 작품은 기약 없이 잊혀질 터.
바람이 솔솔 불기 시작한 가을 어느 날,
몰랐던 소설들을 만나는 일을 소박하게 시작했었다. 그 중에는 단편집이 많았는데 이번에 읽은 이야기도 소설집이다.
총 네 편의 단편(중편 하나)을 수록한 서동욱의 <겨울의 색채>.
겨울을 앞둔 지금에 어울리고 미지의 작가를 만난다는 설레임으로 읽어나갔다.
『당장 필요한』은 25살 마리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냉장고 제조공장에서 일하고 있고 남친 준과 동거하고 있다.
거창한 꿈은 없고 생활을 소박하지만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던 마리.
어느날 모르는 번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경찰이어서 놀랐다. 더 놀랐던 것은 아빠의 죽음 소식. 아빠는 뉴스나 소설에서나 보던 말인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직계 가족인 딸에게 경찰이 당연히 연락한 것인데, 마리는 사실 아빠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소설은 범죄 수사극의 장르이다. 짧은 분량인데도 쫄깃하고, 서스펜스 있는 표현을 유려하게 해서 감탄했다.
『아껴 쓴다면』은 주인공 이름은 나오지 않고 1인칭 화법이다.
서른 초반을 지나고 있고 색종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주인공 청년. 회사가 경영이 어려워서 곧 그만 두게 된 주인공.
그런데 학교 동창들을 통해서 재규의 소식을 들었다. 대장암 말기라는 중병에 걸려서 지금 시골에 가서 살고 있다고.
주인공은 재규와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이였고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어느날 재규로부터 문자가 와서 조금 놀란 주인공.
자기 사는 집에 한번 놀러오지 않겠냐는 재규의 문자. 낚시하기 좋은 데가 있다는 격의 없는 표현. 재규는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마침 애인과 헤어진 직후라 바람 쐬러 한번 가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그러면서 주인공과 재규가 만나고, 낚시터로 가서 처음 같이 낚시를 하는 이야기로 향한다.
서른 초반의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누군가의 죽음을 강렬히 받아들이면서 겪는 이야기. 심오한 톤은 아니면서 진중하고,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함을 놓치지 않았다.
표제작이면서 중편인 『겨울의 색채』
주인공의 이름은 이수정이고, 그녀가 친구의 장례식을 참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앞의 ‘아껴 쓴다면’이 코믹한 터치가 있던 반면에, 이번 이야기는 무척 묵직하고 무거웠다. 이수정의 친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친구이자, 한때 사귀기도 했던 연인 사이.
소설은 두 사람이 얼마나 애틋한 시간을 함께 했으며, 그렇지만 끝내 함께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애달프면서 관조적으로 그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리뷰하는 작품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수록작이다.
「크리스마스 택배」 크리스마스가 들어가는 제목을 너무도 좋아하는 나여서
무척 궁금하게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서른 중반의 택배 기사이다. 어느날 강원도 산골로 배달일을 간다.
계절은 한겨울이고 배송지에는 눈이 예보되어 있었다. 인제나 홍천, 그 부근 도시로 예상되는 곳. 소설의 무대는 그 곳에서도 아주 산골 깊숙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주인공은 할머니에게 택배를 배송하고 서둘러서 서울로 향하려는데, 이럴수가. 눈은 펑펑 내리기 시작하고, 폭설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엎친데 덮쳐서 핸드폰이 터지지 않고, 주인공은 이 사실을 깨닫는다.
“일하러 와서 강원도 시골에 고립되었다”는 걸.
와, 이러한 설정은 너무도 ‘단편소설’ 적이었다.
앞의 빌드업이 무척 탄탄했기에 이야기에 빨려들어갔고,
할머니는 정겨운 시골 할머니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며
주인공더러 하루 묵어가라고 한다.
난 읽는 내내 미소가 입에 걸렸고, 주인공은 비록 ‘재난 상황’이지만,
펑펑 눈 내리는 시골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들에 마음이 설레였다.
와, 이런 느낌이 얼마만이지. 영화 ‘러브레터’에 느껴봤던 겨울의 심상.
단편이기에 금새 이야기가 끝났지만, 그만큼 시간 순삭인 작품이었다.
소재와 설정이 개연성이 있고,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너무도 깨알같아서
같이 당황스러워하다가, 같이 감동하고, 한겨울의 정취를 오롯이 느꼈다.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확연히 느끼게 한
작가의 첫 데뷔작 소설집. <겨울의 색채>.
읽기 전하고, 읽은 후의 나의 정서와 생각이 무언가 변화함을 느낀
기쁨을 선사받은 비범한 이야기들이었다. Aslan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praise (0) | 2024.09.21 |
---|---|
〈혼자라는 건〉 오도네라 후미노리 (0) | 2023.08.06 |
〈남한산성〉 소설 (0) | 2023.04.16 |
각본집 〈안개〉 김승옥 (0) | 2023.01.01 |
어른의 문장력 (0) | 2022.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