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나의 종이들

사나예 2022. 7. 22. 22:36






종이 안에는 내가 먹고, 쓰고, 읽은 것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책에서)

종이.
이는 실제 사물도 그렇고 발음하기도 그렇고 무척 평범하고 친근한 단어다.
<나의 종이들>은 정말로 ‘종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이다.
저자 유현정님은 잡지 기자 등 출판계에서 종사하다가 현재는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다.
종이는 저자에게 생계의 수단이기도 하고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종이하면 주로 책을 생각하지만, 생각해보면 인쇄물은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우리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무리 컴퓨터, 스마트폰이 대세라고 하지만 생활 속에서 종이의 형태로 존재하는 온갖 것들이 주변에 있다.

유현정의 사려깊은 글들을 통해서
작가 개인의 인생사에서 특별했던 종이와의 인연들을 만나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종이가 갖는 의미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책의 부제에 ‘사소하고 사적인 종이 연대기’라고 적었는데
개인적이고 사소한 건 금방 이해되었는데 점차 ‘연대기’의 의미까지 알아갈 수 있었다.

1부 ‘종이속의 나’에서는 작가의 유년시절의 종이의 기억을 소환했다.
와 이 부분이 정말 신선했고, 90년대 초반만 해도 아날로그가 많이 살아있어서
생활 곳곳에 종이가 가치가 있었구나를 느꼈다.
다 읽으니 자연스럽게 작가의 어린시절을 알게 되어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저자는 대학에서 소비자학과, 미술사학과를 복수전공했는데 진로는 잡지 기자를 하셨다.
사실에 근거한 기사를 쓰는 일에 적성과 소질이 있음을 알았고,
글쓰기는 직업 전선의 한 가운데 놓인 그 무엇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한편으로 유현정은 ‘픽션’ 작가의 꿈을 계속 가졌다.
기자로서의 직업은 가졌지만 신춘문예, 드라마 대본 공모전은 전혀 다른 차원의 분야라는 걸 책으로 처음 알았다.

지난달에 ‘손수현’이라는 영화배우의 에세이를 읽었는데 그는 배우 지망생으로서 작은 영화들을 부지런히 만들고 있었다.
그 책을 통해 무언가를 이룬 사람의 글이 아니라, 도전하고 있는 이의 글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걸 배웠었다.

<나의 종이들>에서 유현정씨가 기자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꿈’인 작가의 길을 부단히 도전한 것이 이와 같은 맥락으로 다가와 참 좋았다.
한번도 입상은 못했고 이제는 꿈을 접다시피 했다고 피력하지만
노트북 한 구석에 자신의 공모전 응모작 두 편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는 현정씨.

아, 이건 도전해본 이들만이 더욱 공감할 파트였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수년전에 있어서 컴퓨터에 파일이 있는데, 올 여름이 가기 전에 다시 열람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경험담과 ‘견해’들은 나와 교집합이 여럿 있었으나 미세한 차이가 계속 있었다.
그러다가 중반부에서 완전히 나의 ‘소신’과 합치한 부분이 나올 때 정말 반가웠다.

그야말로 ‘사소하고 소소한 연대기’가 독자인 나와 이루어진 것이다.
그건 바로 ‘영화 티켓 발매’ 이야기.

얼마전에 영화를 현장 구매하러 키오스크를 하는데, 작업 끝에 ‘종이표 발권 없이 입장이 가능한데 발권하시겠습니까’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뭔가 이걸 하면 환경을 거스르는 사람이 될 거 같아 움찔했지만, 20년 넘은 나의 습성대로 당당히 발권을 해서 갔었다.
근데 유현정 작가도 그렇다는 거다.

예전에는 영화 티켓에 고유한 개성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쓰니 라떼는 말이야 같은데 그래도 그건 즐겁고 소중했던 기억이다.
종이를 추억하는 본서에서도 유현정은 그 영화티켓의 추억을 빠트리지 않고 언급했다.

그래, 나같은 사람, 나뿐이 아니었어.

산문, 에세이, 수필집이라 불리는 이 장르를 읽는 소확행은 정말 이런 순간인 거 같다.
소소해서 자칫 하찮게 여겨지는 추억들을 공유하는 것 말이다.

저자 덕분에 ‘종이’라는 말이 수백차례 이상 담긴 책을 만나서 참 좋았다.
종이 라는 한글조차 참 그 물체에 잘 어울리고 좋음을 처음 느꼈다.

나는 책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접하는 정보와 이야기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하고 있는 보통 요즘 사람이다.
그렇지만 ‘종이’라는 건 책을 비롯하여, 재활용의 대상인 폐지,
다이어리 꾸미기, 각종 전단물 등 우리의 생활에 밀접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모바일의 시대에, 공기처럼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유현정 저자처럼 ‘유난스럽고도 사랑스럽게’ 느끼는 이들에게 종이는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사소한 TMI 하나 마지막으로 남겨본다.
최근에 안 사실인데 배우 류준열의 아버님 직장이 충무로셨고 책 디자인을 오래 하셨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의 특성, 아날로그적이고, 여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뭔가 아버지의 직업과도 관련된 듯 해서 기분이 좋았었다.

저자는 인쇄소 집 딸로 태어났다고 한다.
환경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마침맞게 저자는 종이를 좋아했고,
글쓰는 일로 밥벌이를 했고,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으며 이러한 책까지 냈으니 어렸을 때의 경험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거 같다.

종이에 대한 책이라고? 궁금할 분들에게
편안하고 따뜻하고 웅숭깊은 문장들을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 중에서

“사람 사는 집에 신문지는 있어야지” (176쪽)

내게 종이는 제일 흥미로운 탐구 대상이다. 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종이는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종이 위에 감정을 기록하면서 하루의 의미를 발견하고, 책을 읽을 때 손에 닿는 종이의 감촉을 즐긴다.
앞으로도 종이는 내 삶에서 지속적 연관성을 갖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 촉매제가 될 것이다. (240쪽)

분명 내 감정은 이전보다 고요하고 평온해졌다. 매일 코로나 확진자 추이를 살피고 상대의 숨소리에 신경써야 하는 바이러스의 시대에 우울감이 증가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코로나의 시기를 지내면서 우울감이 줄었다.
우울감 속에서 ‘종이’라는 존재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나의 감정을 안정된 상태로 변화시켰다. 나의 방식을 ‘종이 루틴’이라 부르며 지인들에게 추천했다. 매일의 습관이 될 수 있는 부담없는 행동이니까. (141쪽)

종이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내 몫이었다. 그것을 재활용하거나 간직할 수 있도록, 자신과의 접점을 발견하기 위한 계속된 고민 속에서 나는 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종이 안에는 내가 먹고, 쓰고, 읽은 것들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까. 그 흔적들이 내게 용기를 줬다. 오늘도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언젠가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씩 자리 잡았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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