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한마음으로 모르는 체했다. (93쪽)
디지털 장의사 라는 직업을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인터넷에 퍼진 자신의 신상정보나 사생활을 지워주는 일.
<나를 지워 줘>는 이 일을 하는 주인공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리고 있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 강모리가 17세 고등학생이란 것.
어느날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하나 둘 누군가의 사생활을 ‘정리’해 주게 된 모리.
그게 마침 소소한 벌이도 되기에 아마추어로 홈페이지를 개설해 활동중이다.
그런데 소설이 시작하면 뜻밖에 경찰서에 불려 간 모리가 나온다.
완전히 합법은 아니어도,나름대로 의뢰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기에 그걸로 보람도 느꼈던 모리였다.
그런데 경찰이 인터넷 범죄를 수사하다가 모리의 아이피를 발견해서
일종의 참고인으로 불려간 것이다.
다행히 큰 혐의는 없었기에 훈방 조처만 받고 모리는 경찰서를 나왔다.
그러나 경찰에 자신의 ‘일’이 알려진 이상 디지털 장의사를 계속할 순 없었기에
집으로 돌아와서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그런데 다음날에 학교에 간 모리에게 뜻밖의 친구가 찾아온다.
같은 반 학생인 ‘리온’. 그 아이는 아이돌 가수여서 학교에서 스타였다.
모리도 선망은 했지만 평소에 말 몇 번 섞지 않았던 ‘스타’인 리온.
급식실에서 갑자기 자기 앞에 앉은 리온은
할 말이 있으니 따로 보자고 한다.
모리는 ‘혹시 얘가 고백을 하려나’하는 헛물을 켜보나 역시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 리온에게서 들은 말은 뜻밖이었다.
학급 애들을 통해서 모리가 ‘디지털 장의사’를 했었다는 걸 알고
자기의 악플과 동영상을 ‘처리’해 달라고 의뢰를 한 것.
모리는 리온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 사건이 단순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소설은 ‘디지털 장의사’라는 소재를 전면에 다루면서
그 일을 고등학생이 맡아 참신함을 더했다.
모리가 사건을 마주하고, 악플과 링크들을 ‘추적’하면서
추리 소설의 형태를 띄게 된다.
학원, 고교를 배경으로 하면서 일상의 추리극을 그린 좋아하는 일본 작가가 떠올라 흥미로왔다.
소설은 가독성 최고치를 만들면서 빠르게 후반부로 달렸다.
성 착취물을 만들고, 유포하는 범인이 등장하고
모리가 그의 증거를 잡는 일이 스피디하게 전개된다.
이는 마치 경찰의 사이버 수사본부가 하는 일을 주인공이 대신 하는 듯 했다.
그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기에 술술 읽을 수 있었다.
범인은 모리, 리온과 같은 학교의 남학생이었고
그 아이가 성 착취물을 유포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세히 나왔다.
텔레그램을 통해서 주로 ‘말’을 통해서
여자를 희롱하고, 강간했다는 걸 자랑하고, 음란물을 사고 파는 유저들.
이게 그저 ‘쯧쯧’하면서 욕할 수준이 아니었고
정말 분노를 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어느 순간 읽는 것이 힘들만큼, 성착취물 ‘소비자’들의 대화란 끔찍 그 자체였다.
잊고 있던 ‘정준영’ 사건이 떠올랐다.
그 때 뉴스를 통해 들었던 ‘메신저’ 대화들.
단순히 ‘저질이네’하고 넘어갈 수준을 넘어선 인간 이하의 대화들이란 걸
이번 소설로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히 조사를 하고 취재를 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독자인 내가 느낀 ‘참담함’을 먼저 겪었겠구나 하는 것도 알수 있었다.
핸드폰을 통한 ‘성 착취물’의 ‘소비’가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해를 당한 10대 여성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트라우마가 되는가를
알 수 있었다.
용기 있는 소설,
청소년과 모든 어른이 꼭 접해야 할 이야기를 담은 수작
<나를 지워 줘> 이다.
책 속에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모르는 체했다. (93쪽)
독자들이 좀 더 피해자에게 관심을 갖고 공감하려 했으면 좋겠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착취물이 줄어드는 데 저자로서 <나를 지워줘>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기원해 본다. (202쪽) 작가의 말에서
오타 수정
p.25 모르래야 → 모를래야 p.40 물어보려→물어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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