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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친일파 열전〉

사나예 2021. 9. 16. 21:01

 

 

박시백은친일인명사전 바탕으로 책을 집필하셨다.

4,389 중에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153명을 추려 선별하여

책에 담았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나라를 일제에 파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

그들은 백작 귀족 지위를 받고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생을 마친 이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에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고 이후에 정치권에서 자리하거나, 명망가로 변신해 편안하게 여생을 살기도 한다.

 

독립운동을 앞장서 이들의 후손은 가난하고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친일 부역자들 후손은 신기하게(?) 상속을 받거나 부를 축적하여 과시하면서 살았다.

 

정치권과 경제계의 인사들도 알아봐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나머지 분야의 대표적인 친일파를 정리해 보았다.

 

책에서 닿았던 분야는 문학계 문인들이다.

그들이 친일했다고 해서 예전에는 약하게 평가했었는데

언어라는 재능과 무기로 친일한 것도 극악한 일임을 알았다.

요즘 말로 영혼을 자들.

 

이광수 최남선은 한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가 변절한 작가들.

윤치호는 유길준과 함께 조선 최초로 유학을 인물이었다.

그는 테라우치 총독사건으로 6년을 복역했는데 나오자마자 본격 친일의 길을 걷는다.

 

일본, 중국, 미국 유학 경험까지 있었던 그는 해박한 언변으로 강연의 유명 강사로 활동한다.

1941 강연 중에서 옮겨왔다.

금번 일본 제국이 영미를 상대로 일어선 전쟁은 동양 민족을 영미의 압박하에서 구해내자는 동양 민족 해방의 성전인 것이외다.

그러므로 동양 사람이 되어가지고는 누구나 싸움에 나서지 않아서는 것입니다.」

 

김동인은 최초의 문예 동인지창조 창간한 소설가.

이후배따라기’ ‘감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38 신문 매일신보에 일장기를 찬양하는 글로 친일 작가 행보를 시작했다.

국기라는 칼럼은 일장기를 멋있다고 하는 건데 읽어보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1939 총독부를 발로 찾아가서 중국에서 전쟁하는황군 위문하겠다면서

문인들로 구성된황군 위문단사절로 나섰다.

소설가를 넘어 뼈속까지 친일임을 커밍아웃한 그는 이후에 거침이 없었다.

신문에 일본의 전쟁을 칭송하고반도인 참전을 독려하는 논설, 수필을 발표한다.

 

유진오는 해방 후에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지식인이다.

그는 경성제대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인재였다. 1939년부터 조선문인협회,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을 주도하여 좌담, 강연, 매체 기고로 침략 전쟁을 미화하였다.

기고와 강연문에서.

 

동아의 나라 중에서 서양의 장점을 받아들인 나라는 일본이고 동양 정신의 진수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지하고 타락한 서양 문화를 되돌릴 있는 저력을 가진 나라는 일본이다.」

편협한 개인주의의 미영문학을 격멸하고 웅대하고 장려한 동양의 오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이다.」

내선일체를 해결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조선인 자신이다. 이번 특별지원병제도는 조선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병역이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특전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용이하게 이해될 것이다.」

 

서정주는 여전히 문학가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그는스무 벗에게 기고문과 다수의 , 평론, 종군기를 통해 친일에 앞장섰다.

1972년에 변명의 글을 발표하는데나는 일본의 욱일 승천지세 아래 종천순일파로 체념하며 것일 이라는 말을 남겼다.

 

음악이란 사람의 마음에 깊숙한 영향을 주는 매체이다.

그래서인가 책으로 음악가들의 이름, 작품을 접했을 충격이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배웠으며 이후에 즐겨 듣기도 했던지라 말이다.

 

작곡가, 성악가인 현제명은 해방 이후 서울대 음대 학장을 하며 요직을 두루 거친 음악가이다.

미국 시카고 음악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향 선언서를 발표한다.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함에 있다.”

후지산을 바라보며 작곡하고 연국북진대 음악을 담당하며 침략 전쟁을 미화하였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 그는 1942년에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곡을 의뢰받아서만주환상곡 완성하고 지휘한다.

 

제목만 들어도 있는 대중가요들. 그를 작곡한 이들이 친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도 충격이다.

알뜰한 당신’ ‘세상은 요지경’ ‘꿈꾸는 백마강’ ‘목포는 항구다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는 풍각쟁이’ ‘선창’ ‘불효자는 웁니다’ ‘울고넘는 박달재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작곡자들이 그들이다.

 

언론인 중에 김성수는 동아일보 창립자이다.

그는 신문에 학병의 지원을 촉구하며 징병제를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

 

이화학당을 졸업한 김활란. 그는 친일에 앞장서서 일제의 눈에 띄어 1939 총독부는 그를 이화여전 교장에 앉힌다. 당시 총독 미나미와 친분을 유지하는 사이였다.

그가신시대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을 읽으니 어이가 없다. 진심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막연하게 부러워도 했다. 장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 여성 자신들이 어머니, 아내가 것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각오와 준비가 있는 것인가?

실제로 아들이나 남편을 나라에 바쳐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막연한 일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웃음으로 아들이나 남편을 전장으로 보낼 각오를 가져야 한다.」

 

 

 

여러 인사들의 , 강연록을 읽으면서

과연 표현들이 누가 시켜서, 억지로 것인가 강한 의문이 들었다.

 

하나같이 마음에서 우러난 표현임을, 문체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사용자라면 있지 않은가.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친일 부역자들이 행동, 내뱉은 , 글들을 만나면서 비분강개했다.

 

당시에 독립을 꿈꾸던 사람들, 운동을 하는 지사들에게

저러한 사람들의 행보는 얼마나 실망스럽고 치욕스런 것이었을까.

한편 그럼으로써 더욱

김구 같은 투사들, 윤동주와 이육사의 글에서 감동과 전율을 느낄 있었다.

 

이제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흑역사 정확하게 낱낱이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패배주의적이 되거나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면서

독립운동의 역사도 올바르게 알려줄

우리의 현대 역사가 더욱 견고하고 굳건해 거라고 믿게 되었다.

 

일제시대가 저토록 참담하고 민망스러운 시기였음을 뼈아프게 배웠다.

그럴수록, 독립을 꿈꾸고 소망을 잃지 않은 분들에게 더욱 존경심이 들었다.

 

앞으로 일제시대의 역사를 열심히 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게

역사 만화 <친일파 열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