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의 시간이자 성찰의 시간

만인의 인문학

사나예 2021. 4. 23. 03:24


명징하고 수려하다 !

 

 

 

 

 

도정일의 에세이 만인의 인문학은 반전이 있었다.

책을 예상했을 때 요즘의 글 모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저자가 발표한 원고를 총망라해 놓은 거였다.

그래서 처음엔 실망(?)을 좀 했지만 이내 그것은 색다른 즐거움으로 변화했다.

글을 통해서 지난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고 그게 참 좋다는 걸 느껴서였다.

 

전 경희대 영문학 교수인 저자는 인문학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봐 왔다.

간간히 글, 강연 등 활동을 접했는데 이렇듯 25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글을 모아보는 건 처음이다.

개인적으로 견주자면 이동진의 20년 영화평을 모아놓은 책을 읽었던 경험이 오버랩되었다.

 

재미는 한순간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피로를 잊게 한다.

재미난 표현은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을 다 같이 즐겁게 한다. (40)

 

란 거창하거나 멀리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말하기, 듣기를 더 윤택하게 하는

고유한 매체라고 하는 저자.

나도 참 좋아하는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대목을 들려주어서 더욱 친밀하게 읽혔다.

 

한국인은 먹기라는 단어를 희한하게 쓴다는 아티클이 재밌다.

마음 단단히 먹어처럼 음식뿐이 아니라 겁을 먹고, 욕을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

그뿐인가. 챔피언 먹고 1등 먹고 짱 먹었다는 식으로도 확장한다.

 

이런 관용어를 영어로 고대로 번역하면 의미 전달이 안 될 뿐 아니라 큰일 날 일이다.(웃음) 그러하니 우리나라사람들이 먹방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

요즘 들은 사실인데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의 영문 자막은 전혀 밥, ‘먹다가 안 들어간다고 한다.

 

인문학을 이루는 핵심인 문학, 철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자 예술이다.

근원적이라는 건 명쾌한 해답을 허용하지 않고, 인문학을 하는 것이 대단한 돈벌이의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일부 사람들은 인문학에 거리를 두고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인문학 만이 갖는 가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효하다고 저자는 믿고있다고 한다.

 

근원적 질문을 잊어버린 개인과 사회는 근원적으로 불행하다.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철학적 반성의 순간을 놓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 (125)

 

기원전 1세기에 유대 땅에 힐렐이라는 현자가 있었다고 한다. 난생 처음 들은 인물인데 이 분의 한 마디가 뼈를 때렸다. 세상에 무려 BC 시대의 통찰이.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그러나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나는 누구인가?

 

뮤지컬 레 미제라블노래를 얼마전에 다시 돋고 올해에 꼭 소설에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도정일은 2014년 개봉영화 레 미제라블에 대해 썼고 그 대목을 만난 난 환호성을 질렀다.

뮈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행한 것은 환대였다는 도정일 저자.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시민, 국민,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한 환대의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글에서 꼬집었다.

환대는 모든 분리와 분할의 체계를 넘어 사람들사이의 공통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뮈리엘 주교가 말한 우리는 형제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의 환대였다.

 

 

 

 

 

도정일 교수가 1998년 한겨레21에 기고했던 글에서 지적한 한국의 병폐로,

집단주의, 혈연주의, 권력추수주의, 배타성, 권위주의가 있었다.

98년 칼럼이 왜 때문에 지금도 와 닿는 것일까. 씁쓸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거울이다.(158)

 

너도 나도 잘 사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도정일은 굿 라이프를 말하고 있었다.

잘 사는 것을 넘어 좋게 사는 것 말이다. 이는 엄연히 다른 결이다.

나와, 내 집단만이 잘 되기 위해 타자, 다른 공동체는 짓밟아도 어쩔수 없다는 논리가 횡행한다면 그건 결코 ‘Good’한 삶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문학이 더욱 필요하다고 저자는 이어간다.

좋은 삶 또는 (진정)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높이는데 인문학은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으로. (189)

이것이, 인문학의 실용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4차혁명,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가 여러 매체에서 활발했다.

이와 결부되어서 본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았던 아티클은

3부의 다섯 번째 과학기술에 대한 글이었다.

 

2011년의 발표작인데 놀랄 만큼 지금의 현실, 상황에 대입해도 적실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 그저 먹고 사는 현재 조건을 넘어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라는 성찰을 할 수 있음에서 라는 저자.

나아가서 때로는 나는 뭐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

과학과 기술이 눈부시게발전해도 그 기술에 맹목하는 것은 인간다움을 오히려 해칠 수 있다고 저자는 썼다.

특정한 기술력의 이 클수록 어둠도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인문학은 말해야 한다.

또 지난 역사 속에서 늘 그래왔음을 저자는 신뢰한다.

 

휴머니즘, 이라는 말을 우리는 흔하게 쓴다.

Humanism을 도정일은 인문주의라고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건 아니었다.

추구하기에 어려운 건 더더욱 아니었다.

 

어떤 감동적인 실화 미담 뉴스를 접했을 때,

영화 소설 픽션에서 감동했을 때 늘 썼던 표현 휴머니즘’.

인문학은 바로 그것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록글의 대다수가 과거의 것이라고 해서 시대착오적일 거라는 기우는

정말 안 해도 되는 책.

 

지난 20여년을 차분히, 냉철한 동시에 따뜻함과 소망을 품고

돌아볼 수 있는 귀한 글들이었다~.

 

두꺼운 양장 커버, 사철방식 제본 덕분에 앞으로 언제고 편하게 펼쳐들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책 에서

 

문학은 차이에 대한 존중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한다.

아직도 계급, 성차, 인종, 민족, 국가 등 수많은 인간 분할의 도구들이 허다한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에 타자 존중의 태도로서의 관용은 참으로 중요한 윤리적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힘주어 용감히 말하면 역사에는 목적이 있다. 인간의 도덕적 진보, 그것이 역사의 목적이다. 지금, 가장 간절히 요구되는 것은 인간문명에 보편 방향을 주고 지향점을 되찾아 주는 일이다. (236)

 

인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우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가?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진리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문화가 특정의 체제를 유지하는 강대한 이데올로기의 우주라면, 그 체제를 깨트리는 힘도 문화 영역에 있는가? (246)

 

서방적 체제, 가치, 생산 양식과 소비 양식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현대 문명 내부의 맹목성을 보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맹목, 정확히 말해 의 모습이다.

( 251)

환대는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일시적 선심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손님의 권리이고 그 권리에 대한 존중이다. 환대는 보상에 대한 기대에서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주의적 교환의 게임룰 위에서 이루어지는 거래행위도 아니다. 환대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 권리는 당신의 것, 그의 것, 나의 것이다. 내가 환대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한 나는 당신의 환대받을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환대에 대한 타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순간 내가 환대받을 권리도 부정된다.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