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y · 이론과 비평

보라

사나예 2019. 7. 24. 22:23

 

 

 

 

책의 가독성 무엇.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사회 문화를 분석하는 책.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부제-자존과 관종의 감정 사회학.

 

본 책의 제목과 범주를 언틋 봤을 때, 처음에는 외면하고 싶은 쟝르였다.

그러다가 저자에 대한 소개를 읽고 다시 꼼꼼히 책 소개를 읽었는데, 서늘한 통찰이 느껴졌다.

근 1년 정도 이 분야의 책은 안 읽었지만 왠지 끌려서 신청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와우 그런데 정말 읽고 싶은 담론으로 가득했다.

혼밥 문화로 시작하는 저자의 글은, 개인의 취향과 「덕질」로 이어진다.

이어서 저자는 SNS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 먹방과 관찰 영상의 의미를 고찰한다.

 

뭔가 일상에 파편적으로 흩어져있던 사회 현상들이, 책 한 권에 쏙 담겨 있는 느낌이었다.

 

온통 문제적인 현상들을 다루지만 저자의 글은 무겁지 만은 않았다.

 

사회학, 미디어 비평을 전공한 사람의 글쓰기가 얼마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 오랜만에 체감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을 못했던 새로운 분야를 읽는 희열을 실로 오랜만에 경험했다.

 

개개의 사안들은 뉴스, 잡지, 인터넷에 무질서하게 흩어져있다.

전혀 새로운 주제들은 아니었다.

 

깊이, 오래 생각해 보기를 꺼리다 보니, 미처 돌아보지 못한 우리 사회 곳곳의 징후들을 저자는 짚어낸다.

 

안과나 피부과에 갈 때 나는 뚜렷이 인지하는데, 특수해서 과연 제대로 진찰받을까 의구심을 갖고 갔는데, 의사가 친절하면서도 유능하게 증상을 짚어낼 때 있지 않은가.

지금 책 읽은 느낌이 하도 신박해서, 내가 겪은 일 중에 가까운 걸로 비유를 해봤다.

저자는 때로 현미경으로 미세하게, 때로 망원경으로 멀리 세상을 들여다 본다.

 

 

지성으로 무장 武裝하고 센스를 갖고서 정치·경제, 사회·문화를 꿰뚫어보는 저자의 예리한 감각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동안 무감각했던 숨은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 일깨워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갑자기 이 분야를 읽어서인지 약간 과부하가 걸리는 주제들도 있긴 했다.

모바일과 스마트폰을 둘러싸고 아주 최근에 등장한 현상들과 신조어들.

미국과 해외에서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들.

주로 이런 쪽이 모두 새로워서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그러나 인터넷,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서양이 앞서가다 보니

지금 탐구되는 것들이 향후 몇 년 사이에 분명 영향을 끼칠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탁월하게 느껴진 건, 저자가 비평가·분석자이지만 일종의 우월의식 같은 게 전무하다는 점인 듯 하다.

이 필드에서 책을 쓰거나 언론에 나오는 전문가는 뭔가 ‘다 아는 사람이 결정을 내리는’ 미묘한 뉘앙스가 늘 있었다.

반면 저자의 글들은 똑같이 현상을 해부하고 분석은 하지만 과시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관심종자’의 줄임말인 ‘관종’에 대한 해석도 그러했다.

관종은 흔히 대단히 부정적으로 거론되는데 저자는 그러한 ‘욕망’을 사회가 부추겼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셀카 문화, 무엇이든 인증해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가 언젠가부터 되었다는 것.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커뮤니티, 친구들 네트워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 생겨버렸다.

이같은 문화에서 인증으로써 인정을 받는 일에 집착하게 되고, 그 맥락에서 관종이라는 부류도 등장하게 됐다.

 

시각과 청각처럼 보이고 들리는 것이 존재를 규정하고,

이런 방법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관계를 결정한다.

 

 

강보라는 메신저, 모바일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현 실상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또한 웹툰, 만화, 일본과 한국의 드라마, 여러 영화 텍스트를 매개체로, 그 속에 담긴 사회의 징후들을 소름 돋게 해석해 냈다.

 

여느 픽션 못지 않게 빠져들어 금새 읽었다.

새로 접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하나씩 제대로 알고 싶어진다.

 

에세이에서 이렇듯 사회학적, 비평 글들도 왕성하게 발표되면 좋겠다.

 

어느 한쪽으로만의 쏠림은 바람직한 사유 思惟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 책의 등장은 무척 반가웠다.

 

 

〈책 중에서〉

 

타인과 시간을 갖고 난 후에는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38쪽)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의 발전은 개인이 발화할 수 있는 창구를 늘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다른 개인들과의 대화와 같은 형태를 지녔다고는 볼 수 없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해 화자가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그 누구도 청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비대칭적인 구조는 이타적 사고를 봉쇄한다.

(45쪽)

 

조금만 관점을 바꿔 세상에는 모두가 나누어도 충분할 만한 여러 개의 파이가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사회가 정한 특정한 파이가 아니어도 개인이 다양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존중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도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지 않을까?

(47쪽)

 

 

연극무대 위에 여러 캐릭터가 존재하듯이 우리 안에도 한마디로 축약할 수 없는 여럿의 내가 존재한다.

(67쪽)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계획적으로 꾸려나가야만 했다. 이와 반대로 본능의 욕구를 따르는 것은 미개한 방식이었고, 개인의 삶을 망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에까지도 해악을 끼치는 태도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고도의 복잡성을 띠는 가운에 여러 측면에서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끊임없이 통제하고 관리하는 이전까지의 방식은 점차 실효성을 잃게 되었다.

더군다나 저성장과 신자유주의적 경쟁은 사회적 계층간의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고, 경직된 사회 안에서 소비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탕진이라는 사회적 금기는 신의 선택이나 국가와의 계약이라는 존재론적 명분이 의미를 잃은 오늘날 탕진잼과 같은 형태로 변형된 것인지 모른다.

(82쪽)

 

 

아오노 슌주 靑野春秋의 만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은 갓 마흔이 된 남성 시즈오가 만화 작가가 되는 과정을 쫓는다. 홀아버지와 고등학생인 딸과 함께 사는 시즈오는 직장을 그만둔 후 만화 지망생의 삶을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시즈오에게 만화가로서 재능은 없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하는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차갑다.

제목에서도 엿보이듯이 시즈오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생물학적으로 어른의 연령을 훌쩍 넘겼다 할지라도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자신의 더딘 성장을 다독인다.

성장하고 있는 중이니 다그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어른’의 말이 값싼 자기연민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시즈오처럼 계속 성장하는 수밖에는 없다.

어른의 성장을 바라보는 현실이 아무리 매몰차더라도 말이다.

(118쪽)

 

 

현실 로그아웃은 결국 현실에 발 디딜 자기만의 장소를 잃은 순간과 다를 바 없다.

그 순간은 밀레니얼 세대에만 국한된 것도 소수의 현실 부적응자에게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로그아웃하고 싶다는 마음을 국지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지금의 현실세계가 공고히 한 정형성의 신화가 서서히 그 결말에 다다랐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얻지 않고도 삶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할 수 없다면, 현실은 더 많은 사람을 가상으로 내몰 것이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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