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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예 2019. 6. 11. 17:03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이 책은 중견 사진작가 이재갑의 사진집이다.

요즘에 사진작가의 책들을 읽으며 내게 잘 맞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만나서 읽었다.

 

이재갑 작가는 오래전부터 ‘역사’를 주제로 한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번 책을 기획하면서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우리나라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을 탐방하고 그걸 기록하였다.

 

작가가 답사한 지역은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교토 우토로, 히로시마, 오키나와 이다.

 

저자는 일본에서 활동해온 재일 조선인 활동가 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탐방했다.

자이니치로서, 조선인 강제징용의 역사를 알려온 배래선 선생과 함께 했다.

배래선 님의 아버지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해방 이후에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수많은 재일동포의 한 분으로 산 증인이셨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재일동포 분을 통해서 듣는 강제징용의 역사는 참혹했다.

더 분노가 일었던 것이, 일본이 종전 후에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강제 징용의 사실을 얼렁뚱땅 넘겨왔다. 아예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여러 현장들을 교묘하게 포장해 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 와서, 착취하고, 노예에 다름없이 대우했다.

그러한 현장들이 일본 땅 곳곳에 있는데, 이 현장들은 제거가 되거나 남아도 애매모호한 ‘기념’을 한 곳이 많았다.

 

배래선 선생님을 비롯하여, 자신들도 일제 징용의 피해자임에도 한 평생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쓰신 재일조선인 분들이 많으셨다.

그분들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하고 고개가 숙여졌다.

 

그냥 감사한 차원을 넘어, 그분들의 기록, 기억, 기념 활동이 아니었다면 묻혀졌을 역사였다.

 

수탈의 역사가 묻혀졌을 걸 생각하니 아찔한데, 정말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러한 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이밍을 놓쳐서 은폐된 역사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일제의 침략전쟁의 실상은 얼마나 끝이 없을지, 그 한계를 알 수가 없다.

 

소수 인원이긴 하지만, 강제징용에 관심을 갖는 일본의 시민단체도 존재해 왔다.

오래전부터, 재일조선인 활동가와 연대하여서 일제의 만행을 알려오신 일본 활동가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느꼈다.

자국의 역사를 반성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분들이 진정한 일본의 양심이 아닐까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 측면에서, 전범 기업으로 승승장구한 주제에 오히려 한국을 깔보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분노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후쿠오카의 대표적인 탄광지인 지쿠호. 그곳에서 일제 시대에 탄광업으로 성공한 아소 가문이 대표적이다.

 

아소 가문은 탄광업이 사양길에 오르면서 쇠락은 했지만 1960년대까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를 기반으로 종합병원을 세우거나 다른 사업을 운영하며 명맥을 이었다.

이 가문에서 정치인이 나왔는데, 전 前총리인 아소 다로이다.

 

아소 다로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망언을 일삼은 인물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다”.

아소 다로는 일본 극우파의 실세였고, 정계 은퇴 후에도 조상이 이룬 부로 아소 시멘트를 물려 받아 잘 먹고 잘 살았다.

 

『일본은 1939년부터 1945년에 약 100만 명이 넘는 우리 동포를 강제 연행했다.

조선 국내에서 동원한 485만명과 합하면 실제로는 6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연행된 셈이다.

후쿠오카 지역 41개 광업소에 배치돼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사람은 약 11만 명인데,

그 가운데서도 아소 탄광은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노동 착취가 가장 심했던 곳이다.』

(23쪽)

 

 

시모노세키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가장 왕성한 항구였다. 관부 연락선이 운영되어 부산을 통해서 일본 쪽으로 숱한 수탈의 이동 통로 구실을 했다.

지금은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항구의 곳곳을 공원이나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그럼에도 배래선 님을 비롯한, 강제징용을 기억하는 조선인 분들에게는 시모노세키 항은 악몽과 같은 곳이다.

 

일본의 교묘한 행보들에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침략 수탈의 거점이었던 곳, 참혹한 인간 말살이 이루어진 곳에 기념비 같은 것이 거의 다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만행은 싹 숨겨놓고, 그냥 덤덤하게 예전에 전쟁의 현장이었다는 식으로만 기술해 온 것이다.

 

더 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본이 패전하긴 하였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눈부신 근대화를 이룩했고, 그 현장들이 근대화의 초석이었다는 뉘앙스의 문구들을 적어넣었다.

 

재일조선인, 뜻있는 일본 활동가들에게 이러한 일본의 이중적인 모습은 개탄스러움과 부끄러움이었다.

 

교토 우토로 마을은 조선인 거주 지역으로 일본의 탄압을 지속해서 받은 상징적인 마을이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하여 한국의 시민단체, 전 세계의 관심있는 분들이 우토로를 도운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일본이 가미가제 특공대가 있었는데, 배로 인간 어뢰를 하는 가미가제도 존재했다.

이 배를 은닉하기 위해서 해안가에 동굴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일을 했다.

이 작업에 조선인들이 투입되었고, 동굴을 만든 흔적들이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일제의 침략전쟁, 태평양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던 것인지,

조선인이 강제징용된 실상을 통해서도 더더욱 알 수 있었다.

 

강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노예에 가까운 처우를 받으며 목숨을 걸고 일했다.

책을 통해 보니, 온갖 험하고 위험한 일들에는 하나같이 조선인 노동자가 들어 있었다.

 

징집을 당해 총격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것만이 위험한 줄 알았다.

한편,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강제 노역을 한 것도 무척 위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일하다가 요즘으로 치면 산재로 사망하신 분들이 많았고, 병에 들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고, 영양실조에 가까워 죽고 그런 분들이 부지기수였다.

 

배래선 님은 이재갑 작가와 헤어지면서 짧고 굵게 이렇게 말하셨다.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됩니다.

현재 일본 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철도 침목 하나가 조선인 한 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도쿄를 비롯한 일본 전역의 도시들은 세계적인 레벨의 경제 대도시다.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눈부시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렇게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근대화, 그 이면에 침략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침탈의 한 중심에 수많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 목숨이 서려 있었다.

 

책은 말한다. 일본의 경제발전의 인프라를 이룬 각종 산업들에

조선인 강제징용의 희생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이 책을 통하여서,

수십년 동안 지속적인 박해와 멸시를 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당한 역사를 기록해 온 재일동포분들의 노고에 다시금 감사했다.

 

역사는 기록 記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기록을 담당한 주체 중에,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 동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또한 이를 옆에서 도와온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의 노고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 땅 곳곳에 서린, 조선인 강제징용과 희생의 역사들.

이를 끈질기게 기록하고 알려온 분들.

이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한국의 역사가 아닌가 싶었다.

 

대학 학계, 저술 활동, 영화와 소설, 대중문화.

이러한 모든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책처럼 사진의 르뽀르타쥬도 무척 도움이 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도구로든, 어떤 매체로든

묻혀진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쓰여지면 좋겠다.

 

한 가지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건 이거였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잊고 방치하면 묻혀진다.

묻혀지는 진실은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러한 점을 깨달았을 때 소름이 돋았고 경각심이 들었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일본에 남은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배는 일제강점기의 여객선으로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일본 경제 건설과 근대화의 초석이라는 명분 아래 끌려가는 데 이용되었다.

이렇게 끌려간 우리 젊은이들은 결국 인간성이 말살된 잔혹한 전장에서 이유 없는 죽음을 강요당했다.』

(80쪽)

 

『미쓰비시의 나가사키 조선소. 일제강점기에 초대형 전함을 만들면서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해 혹사한 군수공장이다. 지금도 해상자위대의 이지스 함을 건조하는 등 배를 만들고 있다. 현재의 미쓰비시 중공업은 과거 미쓰비시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한일협정을 들어 배상을 거부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124쪽)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4년까지 해저 탄광으로 유명했던 하지마 섬에 상륙했다.

이곳에는 해저탄광에 일을 하기 위해 온 광부들이 묵었던 숙소와 영화관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약 5,000명이 살았다.』

(130쪽)

 

 

『한국의 자료 중에 놀라운 사진이 한 장 있다.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에게 두 발이 잘려 나간 변씨 성을 가진 남자 사진이다. 선교사에 의해 전해진 이 사진은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이 품에 간직했다고 한다.

그가 1939년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 암살 미수로 체포돼 백정기 의사와 함께 12년간 감옥 생활을 하는 도중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낄 때마다 꺼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삼았다.』

(224쪽)

 

 

『원폭에 의한 실질적 피해는 일본인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자국의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삶 또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조선인과 일본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전쟁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일본은 자국의 피해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원폭을 맞은 실질적 경위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이런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뿐 어떠한 반응도 내놓지 않는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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