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일 다음날에 좌석 맨 앞에서 얼떨떨하게 감상했던 첫 번째 감상 후 무언가 미진한 느낌도 있고 해서 주말(8/4)에 다시 예매하고 극장을 찾았다. 평일 오후 시간대와 변함없이 좌석 점유율이 거의 100%인 것에 다시금 혀를 내두르며.
제일 앞에서 보는 것과 중간쯤에서 보는 영화가 참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봉테일이라 불릴 만큼 영상미에도 일가견있는 감독의 스타일 때문일까. 첫 번째 감상과는 또 다른 요소들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윌포드로 상징되는 ‘절대 악’과 그에 대항하는 ‘커티스’(세력)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한번 바라봐 보았고 이 리뷰는 그러한 필자의 생각을 펼쳐보고자 한다.
그저 팬심으로, 그렇게 엄청난 기대를 안지 않고, 동시에 한 껏 열린 마음으로 감상한 처음에는 미처 못 느꼈는데, <설국 열차>가 얼마전 본 <더 테러 라이브>처럼 리얼 타임(real time) 무비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것. 앞부분은 커티스 무리가 앞쪽칸으로 진격하기 위해 준비하고, 설왕설래하며, 플랜을 가다듬는 모습이 있지만 영화 시작후 25분후 부터는 본격적으로 머리칸으로 나아가면서 한 칸, 한 칸(영화에서 section으로 불림) 나아가는 동시간대 스토리였다.
전작(前作)들에서 역시 봉준호 각본만의 대사들의 감칠맛은 한국인만이 미묘하게 느낄 수 있는 언어 유희들이 많이 있었고, 매니아들이 그 부분에서 쾌감을 느꼈던 게 맞다. 그런데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 열차>는 남궁민수 송강호를 제외하고는 역시 그런 맛이 없기 때문에, 얼핏 봉준호 영화인가 싶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다시 차근히 보니, 매니아들이 느낄 수 있는 웃긴 포인트들이, 아니 정확히는 웃픈(웃기고 슬픈) 뉘앙스가 곳곳에 있었다. (무척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인 영화지만) 이상하게 묘하게 웃음이 나왔는데, 영화 내용을 다 알고 나서 다시 봐서 그런지도.
꼬리열차칸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던 끔직한 현실에서, 누군가의 ‘희생’을 계기로 각성하고 서로를 조금씩 희생해가며 인간성을 유지했다는 설정이 무척 인상깊게 다가왔다. 거의 기적적으로 그런 ‘반성’이후에 꼬리칸에는 인간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미덕들이 부활했던 것이다. 아픈 사람을 돌보고, 어린아이와 약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아무런 꿈도 없이 짐승처럼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반란을 일으켜서 윌포드라는 절대 권력에 대항하겠다는 목표를, 그래서 비로소 키워나갈 수 있었다.
사람의 선량한 심성을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스토리에서 일부분으로 전해들었지만, 커티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그 이후 한 칸 한 칸 나아가면서 ‘악’과 싸워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그러한 사람들의 ‘변화’를 확고하게 반증하는 것이었다.
되도록 합법적 절차와 ‘말로’ 해서 윌포드와 만나 협상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인간적으로 최선인 거겠지만, 끔찍한 대우와 압제를 18년간 받은 상황에서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타냐의 아들 티미를 빼앗기면서 ‘혁명’에의 도화선의 불은 붙어버렸고 칸(section)마다 진격하며 무차별 학살을 경험하고 커티스에게는 단 하나의 가족인 에드가마저 잃고 커티스 일행의 목표는 공고해진다.
그러나 봉준호의 결말은 역시 상상 밖이었다. 적지 않은 피를 흘린 이후에 극적으로 간신히 만난 윌포드의 칸. 아니 설국 열차에서는 최대로 호화로운 방에 다름 아니며 고독감까지 느껴지는 그 곳에서 윌포드에게 들은 불편한 진실들은, 삽시간에 커티스를 멘붕으로 몰아 넣었다. 까딱하면 독재자의 후계자가 되어버릴 뻔 한 순간, 남궁민수의 딸 요나의 초능력 덕분에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커티스. 그리고 관객이 보신 대로의 결말이었다.
에드 해리스의 연기가 압권이었던 것은 시나리오에서처럼 ‘악인같지 않은 악인’을 놀랍고 소름돋게 펼쳐보였다는 점이다. 어차피 멸망 이후의 소수 정예의 인류를 상징하는 열차(Train)에서 최대한 조직을 유지하려면 때마다 74%의 인간(꼬리칸)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논리는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원작 만화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전염병의 발생은 앞쪽칸 사람들이 가장 염려하는 사태였으니 말이다. 아니면 몇 년에 한번 일어나는 ‘자연스런’ 폭동을 통해 서로 죽고 죽이게 함으로써 윌포드와 수뇌부가 굳이 손에 피를 안 묻히고도 인구가 효과적으로 조절될 수도 있었다. 바깥은 영하 80도 이하의 혹한의 빙하기이니 살려면 차선책이라는 윌포드의 논리는, 언젠가 늙어 자연사할 윌포드가 어차피 후계자를 물색해야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결국, 설국 열차로 상징되는 미래의 마지막 인류집단에서 그들의 최후의 인간성(humanity)를 구해낸 건, 커티스의 단 한 명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다. 너무 문학적이고 상징적인 비유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과 압제에 대한 대항도 단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아끼는 한 사람이 무고하게 죽은 것에 대한 분노로 행해졌다는 교훈을 되내이게 된다.
원작이 갖고 있는 디테일한 미래 세계의 묘사, 염세적임에도 눈길이 가는 설정들에 2004년에 처음 마음을 빼앗겼던 봉준호. 결국 2013년에 이렇게 완성하고야 만 <설국 열차>는 호러 영화적인 측면도 있고, 기존의 봉준호 영화들에서 볼 수 있었던 엉뚱한 이야기와 예민한 장면들이 일부 관객들에겐 어리둥절함으로 다가갈 것 또한 분명하다.
다국적 합작품의 대규모 예산으로 스케일도 커졌지만 적어도 연출자 자신만큼은 그렇게 많이 부담을 느껴던 것 같지 않다. 워낙에 섬세하고 미술쪽으로도 완벽주의인 감독이기에 누구보다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미장센이나 스토리 텔링을 하지 않았을 봉준호라는 걸 새삼스럽게 절감했다.
유럽에서 뒤늦지만 완전히 봉준호에 매료된 영화 저널이 그를 오래 인터뷰하고 나서 기사 타이틀을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고 한다. ‘삑사리의 미학.’(카이에 뒤 시네마) ‘Piksari’라고 적어 한국어 발음까지 살려가면서. 근데 그게 돌아보니 놀랍도록 맞게 감독의 세계를 꿰뚫어 보는 타이틀이 아닌가. 액션 장르인가 하면 삐끗 어긋나는 장면을 넣고, 현실을 비판하고 전복하려 하다가도 그저 허허실실 웃기는 인물들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하는 봉준호의 영화들엔 분명 삑사리 미학이 있다. 여러 인물들의 관계, 앞쪽칸의 부조리한 풍족함, 엔딩에 아름답지만 먹먹하게 하게 우리를 강타하는 풍경의 이미지
<살인의 추억>과 <괴물>,<마더>와는 많이 다르다고 실망을 드러내는 리뷰어들 사이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설국 열차>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고, 그려내고 싶던 스토리와 그림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전투를 벌이며 전진하는 열차 칸 중간쯤에서 커티스가 일행에게 말하는데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기도 했던 대사가 “우리는 앞으로 간다.”였다. 아마 봉준호가 4년여간 영화 현장에서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 했던 주문이 저 문장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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