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예민함이란 탁월한 미적 취향의 다른 표현이다. (197쪽)
서양 철학과 미학을 전공한 연구자가 ‘덕후’에 대해 쓴 글.
이것만으로 굉장히 신선한 기대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와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책은 ‘띵’작이었다.
명을 띵이라고 하는 것부터 덕후의 표현이니 이 책을 표현하는데 딱인듯하다.
아이돌 멤버에게 다채로운 별명을 지어주는 문화로부터 소쉬르의 기호학을 불러왔다.
예컨대 에이핑크의 윤보미는 ‘뽐가너’라는 별명이 있다. 그녀의 애칭 ‘뽀미’와 미국 야구선수 범가너의 이름을 합친 것. 보미는 야구에서 시구폼이 탁월한 걸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먹보미’는 그가 복스럽고 맛있게 잘 먹은 것에 팬들이 붙인 것.
‘실력이 뛰어나고 잘생기고 성실하고 귀엽다’는 상투적 표현만으로는 매력이 충분이 표현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팬들.
덕후들은 자신이 덕질하는 대상의 본체가 뿜뿜하는 매력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기호화한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기의와 기표인 시니피에, 시니피앙을 말했다.
이름은 존재를 정의한다.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담아내는 거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안 사실 하나는 한국어 쭈꾸미, 세발낙지, 문어가 모두 영어로는 단 하나인 Octopus 라고 한다. 이러면 영어권에서 쭈꾸미는 식별되지 않는 채 존재해 온 것이다.
시니피앙(이름)이 시니피에(존재)를 완성시킬 수는 없지만
본질을 꿰뚫는 은유, 탁월한 표현으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의 가치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
매력 넘치는 사람에게 덕후들이 부여하는 온갖 별명들이 이러한 행위라고 차민주는 설명하고 있다.
팬인 한 사람이 어떤 ‘별명’을 붙였다고 그게 바로 유행되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러한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약속을 공유하는 집단이 필요하다.
방탄소년단의 Army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기호 공유’ 집단에 해당한다.
언어에 담긴 규칙을 공유하고 같은 세계관을 갖는 사람들이 같은 덕질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공감해주는 대상들에 둘러쌓일 때 안정과 위로도 얻는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어떤 면에서건 비슷한 이들을 필사적으로 찾는 것은 모두 내 ‘기호’를 이해해 줄 사람들,
내 파롤을 랑그로 들어줄 사람들을 찾는 일인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서는 ‘초월’의 개념을 불러오는 저자.
덕후 단체에는 이름이 있는데 덕후는 스스로를 ‘새우젓’이라 칭하곤 한다고 한다.
스타들이 콘서트장에 모인 팬을 바라볼 때 마치 새우젓처럼 뭉쳐진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의미의 비유이다.
철저히 익명성, 무리지어진 의미인 새우젓은 일견 비하처럼 보이지만 덕후 세계에서는 기꺼이 자처하는 일인 것.
덕후는 덕질 대상에 대한 보상 없는 응원과 노력을 한다. 그들이 이름없는 존재가 된 것은 선한 일에 대한 공로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다. 덕후는 익명의 선행과 공헌을 지향하는 존재들이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위한 착함(善)이라는 초월을 추구한 철학자이다.
그 초월이 당연한 문화로 실현되는 곳이 덕후계라고 차민주는 보았다.
레비나스는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초월이란 자기 존재의 세계를 넘어서는 일이고, 인간이 자기만을 위한다는 상식을 부인하는 일이다.
초월은 주로 익명이어서 더 선하다. 진짜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이름없이 공동체에 기여하여 집단을 변화시킨 사람들이 아닐까 라고 저자는 믿는다.
동방신기의 노래 정반합에서는 변증법을 읽어내고 있다.
동방신기 이후로 많은 K 팝 가수들은 노래 가사에서 철학적인 면을 많이 드러냈다고 한다.
우리는 늘 다른 무엇이 되려는 충동과 욕구를 갖고 있다는 저자. 자신과 모순되고 자신을 초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모순이 없이는 생명, 운동, 성장,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 저자는 덧붙였다.
여전히 덕후들은 ‘일반적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차민주는 분석한다.
왜냐면 그들이 돈이 안되는 일에 몰두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교환가치를 최우선으로 보는 사람이 볼 때 덕후는, 시간이라는 자본을 헛되이 쓰는 듯 보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차민주는 칼 마르크스를 불러온다.
자본론적 관점에서 덕후의 노동은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지만 덕후의 관점에선 ‘행복으로 지불받은 노동’이다.
덕후가 덕질에 쓰는 시간, 돈, 에너지는 오롯이 만족감, 행복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경제에서는 ‘화폐’만이 양적 가치이다. 허나 요즘에는 질적 가치, 주관적 만족감 같은 효용가치가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즉 질적인 가치, 주관적 만족감은 취향이라고 불리우는 시대이다.
차민주는 질문을 계속한다. 덕질 문화는 ‘고급스럽지 못한’ 하위 문화인가?
미학계에서는 대대로 고급, 하위 문화에 대한 정의와 논쟁이 있었다.
저자는 이를 쭉 돌아본 후에 1970년대에 애니메이션, 비디오 게임이 등장하면서 대중 문화가 폭발하였음에 주목했다.
덕후 문화는 이때 태동했고 SNS와 네트웍 게임의 2000년대를 거쳐서, 유튜브와 개인 미디어가 대중 문화를 주도하는 2010년대에 이른다.
즉 10여년전부터 덕후 문화가 대중문화의 최전선에 선 것이다.
물론 덕후는 1차 생산자는 아니다. 덕후들은 아이돌, 게임, 영화, 만화 등을 적극적으로 향유한면서 2차 저작물을 생산한다.
덕후는 원본을 편집, 가공, 재생산하여 유통하고 감상하는 편집 감상가이다.
예술가의 창작 작업의 본성은 그가 경험을 전달할 때 특수한 방식의 학습된 기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기술에 통달해 있는 것이 그의 예술인 것.
예술의 목적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경험을 예술로써 전달하는 데 있다.
덕후는 덕질이라는 특별하게 학습된 기술을 갖고 있다고 차민주는 보았다.
덕질의 핵심 활동은 감상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는 예술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
예술의 중심이 창작자에게만 있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그 중심이 감상자에게 까지 확대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차민주는 놀라운 기회를 독자에게 알려준다. SNS와 개인 미디어로 연결된 지금에는 1인의 문화에서 시작했을지라도 공감대만 얻는다면 누구나 문화 혁명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덕후가 아니라도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은 시대의 공감을 얻어왔고 현 시대는 더욱 그렇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좋아서 하는 일에는 진심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차민주는 2000년대부터 있어온 덕후의 문화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여
최근의 현상들까지 철학, 미학의 관점으로 분석해서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어렵다고 생각한 서양의 철학자들, 우리와는 무관한 듯 했던 미술작품들이
저자의 신박한 시선과 해박한 지식을 통해서 덕후 문화와 연결되는 점들이 너무도 짜릿하게 읽혔다.
디카프리오가 디카프리오 했다, 라든지 (최우식을 일컬어) 우며들다 라든지
이런 표현들을 들으면서 그저 장난스럽다고 여겼는데
그 기저에는 ‘거대하다’고 할 정도로까지 치열한 덕후 문화가 있었음에 놀랐다.
덕후들끼리 그저 재밌자고 시작하는 어떤 ‘덕질’이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렇게 순수한 동기로, 한 집단에서 행한 덕후 문화는
공허하거나 어디로 사라지는 게 절대로 아니었다.
그것들은 무언가의 ‘가치’로 남아서 우리의 문화를 끊임없이 가꾸고,
계속된 이런 선순환은 어느 지점에서는 ‘혁명’을 일으킨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덕후를 다룬 책이 없는 게 아니고 철학을 해설하는 책은 더욱 많지만
그 둘이 크로스~된 이 책. 정말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다루는 철학자, 미학은 석박사 수준에 있는 차원이다.
청소년 대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지만 정말 깊이있는 이야기를 훈련된 문장으로 담아냈다.
유쾌한 일러스트들은 이해와 가독성을 높인다.
금방 빠르게 읽히기도 하지만
단어들, 문장들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도 좋을 책.
나는 이제 느리게 하는 2차 독서를 하러 가야겠다~~
책 중에서
‘나’는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갖게 되는 내 의견들의 총합이다.
지향성, 세계관, 취향 같은 것들이 나를 구성한다. 내가 바라보는 방식이 나를 만든다.
과연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질문을 기억하자.
귀엽게 바라보면 귀여운 내 세상을 갖게 된다. 어떤 세상을 가질지는 전적으로 내 결정에 달려 있다. (125쪽)
덕질이 아니더라도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은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일이다. (143쪽)
일상이 권태로울 때 달성불가능한 목표를 세우거나 일부러 장애물을 투입시키면 삶은 흥미진진해진다. 내가 만든 목표이자 고통이 삶을 치열히 욕망하게 할 것이다. (158쪽)
내가 그냥 좋아하는 것들은 본질적인 나의 욕망을 나타낸다. 과시나 유행을 따르기 위함이 아닌 내가 진짜로 원하는 나의 욕망.
숨어서 하는 일, 혼자서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하고 싶은 진짜 당신의 욕망은 무엇인가? 진짜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167쪽)
특별한 예민함이란, 탁월한 미적 취향의 다른 표현이다. (197쪽)
개념을 이해할 때 글이 아닌 이미지를 검색하는 오늘날, 이미지로 은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덕후는 ‘이미지의 시인’이다. 시인들은 새로운 언어로 숨은 진리를 캐낸다.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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