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길 인생 멘토

사나예 2019. 5. 24. 19:44

 

 

 

 

 

 

 

 

 

완전한 침묵은 위로의 말이 필요할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고,

진정한 고독은 다가오는 아픈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주는 것이다.

 

(81쪽)

 

 

 

 

 

얼마전에 큰 이슈를 일으켰던 국내 뉴스 하나가 있었다.

한국 국적의 여성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무장단체에 납치되었다가 프랑스 군인한테 구출되었다는 소식이다.

 

이때 나는 이 뉴스에 주의를 기울이고 베스트 댓글을 면밀하게 주시했다.

 

처음에는 ‘가지 말라는데는 좀 가지 마라’, ‘여자가 위험하게 그러게 왜 갔냐’ ‘한비야가 애들 다 망쳐놨다’같은 댓글이 베스트에서 호응을 받고 있었다.

첫 번째야 그렇다쳐도 두 번째, 세 번째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어서 난감했다.

 

 

그런데 며칠후에는 이색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여행자가 당시 갔을 때 부르키나파소는 여행금지국이 아니라 제한국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프랑스 군인이 자국민을 구하려다가 미국인과 함께 같이 구한거다’

같은 댓글이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 뉴스가 떠오른 건 <길은 다시, 당신에게로>를 읽으면서 떠올라서 였다.

 

책은 ‘사진 에세이’라는 굵은 제목을 달고 있었다.

 

사진 에세이. 그렇게 낯선 범주도 아니고 종종 읽었는데, 표지의 심플한 명명이 새삼 눈에 띄었다.

 

오철만 작가의 글과 사진은 진정 사진 에세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멋지고, 사색적인 작품으로 가득했다.

 

 

 

그 사진들은 단순히 멋부린 것만은 아니었다.

 

외국과 국내의 여러 장소들에서, 여러 계절에서, 누군가와 때로 홀로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필름이라는 매체로 촬영해서인지 처음에는 올드한 느낌도 났다.

언젠가부터 너무 디지털에 익숙해져서 필름 사진을 보니 현기증이 나기도 한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은, 하나의 철학이고 시 詩 임을 이 책으로 깨달았다.

 

저자는 그냥 순간 포착 뿐 아니라, 여행하고 방문하면서 겪는 경험들 속에서 현실을 발굴한다.

 

그래서 작가는 사진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는 미쳤다, 라는 표현까지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작품집이다.

 

 

관광지에서, 예쁜 대상을 스냅 사진으로 찍는 것과, 일부러 어렵고 낯선 데를 찾아가서 피사체와 만나는 작품 사진은 분명 다른 결이었다.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산악인이 왜 산을 오르는지 이유를 다 알 수 없듯이,

사진가에게 왜 그렇게 고생하면서 사진을 찍는지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을 듯도 했다.

 

그런데 저자의 이 말

‘다르게 세상을 보려고 사진을 시작했다’는 말이 어렴풋이나마 한층 이해감을 갖게 하였다.

 

 

예술 사진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림 못지 않게 창의적인 분야이기도 하다.

다양한 앵글, 필터, 인화 방식을 거쳐서 자연 그대로의 현실을 조작하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들은 현실을 다르게, 다른 차원으로 보는 눈을 키워주는 것 같다.

 

 

오철만 작가의 사진들은 인공적인 기법을 터치하는 표현주의적인 사진부터

편안하고 친근한 풍경 사진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때로는 ‘음? 무슨 뜻일까’ 싶은 사진도 있다.

 

어려운 듯한 사진에는 짧막한 구절을 적고 있는데 글과 함께 시너지를 일으켜면서 독특한 느낌을 선사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기도 하고, 새로운 사진을 창작하기 위해 여행하기도 하는 작가.

사진들을 쭉 일별하면 한 철학자의, 시인의 생각과 정서를 전달받는 기분이 들었다.

 

 

#잘 만나기 위해

 

낯선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설렘의 줄다리기다. 무게추가 쉽게 기울어지지 않으면 결정을 미루고 나는 잠시 완충의 시간을 가진다.

어리숙한 표정으로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하고 해가 질 때까지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린다. 그렇게 마음이 채워지길 온종일 기다린 후 새로운 만남 속으로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간다.

 

나의 몸과 마음에 배인 냄새와 표정을 비워내야 할 때가 있다.

 

(62쪽)

 

 

 

글에서 음성이 지원되는 문장이 있다면,

사진에서 역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책이 있다. 이 사진 에세이가 그랬다.

 

 

 

맑고 화창한 날, 청명한 바닷가, 비오는 센티멘탈한 날,

 

낡고 우중충한 장소, 노동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미소.

 

 

사진을 보면, 그냥 느껴진다.

 

사색을 하게 하고, 스마트폰과 뉴스거리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는 이 사진들이 정말 좋다.

 

 

 

지금이 언제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어떠한 질문도 솟아나지 않는 시간에 머물며

생각의 질료들이 풍경의 침묵 속으로 녹아들 때까지 기다린다.

 

시간이 완성한 결과들은 무너져 내리지 않음을 믿으며.

 

(90쪽)

 

 

 

 

컬러도 멋있지만, 흑백으로 촬영된 사진들은 흑백영화를 보는 것처럼 색다른 시선을 만들어준다. 더군다나 필름 이어서 더욱 고전적인 아우라를 선사한다.

 

흑백 사진에서는 사진이 빛의 예술임을,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절묘한 아름다움을 새삼 일깨운다.

 

 

책장을 넘기다 만나는, 어느 오지의 남루한 행색의 소년들.

 

그 아이들의 맑고 티없는 미소, 호기심 어린 표정이 마음을 툭 건드렸다.

심쿵 하게 했다.

 

가난한 나라, 혼란스러운 나라라고 일축되는 곳의 소년들은 여행하는 이방인에게 돈으로 매길 수 없는 미소와 손짓을 선물하였다.

 

사진가는 길 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예측할 수 없고, 경이로운 순간을 만난다.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하여,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 셔터를 누른다.

 

 

<길은, 다시 당신에게로>는

 

작가의 오랜 땀방울과 헌신과 기도로 얻어진 그 사진들을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다.

 

 

작가의 사진들은 익숙하고, 다 안다고 생각한 장소들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게도 했다.

서울에 위치한 세운 상가. 이 곳에를 몇 번 갔지만 특별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저자는 낡은 건물, 낡아가는 풍경에도 카메라를 들이 댄다.

 

그 속에서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한번도 왜 못 봤을까.

 

 

무조건 새로운 것, 현대적인 것만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낡은 것, 하루하루 낡아가는 것들에도 고유한 정서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사진들을 통해서

이 피조세계가 무수한 색채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게도 된다.

 

사진가는 빛과 그림자를 관찰하고, 색채를 보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눈 호강 뿐이 아니라

시적이고 철학적인 글과 어우러져서 풍성한 감상을 하게 한 책

 

<길은 다시, 당신에게로> 였다.

 

 

 

책에서

 

 

 

어떤 과정을 지나왔건, 친구와 다정히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지난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은 아름답지 않은가.

(107쪽)

 

 

 

가치 있는 것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122쪽)

 

 

 

때때로 피었다 지고 마는 이 좋은 마음은

오직 깊은 침묵 속에서만 붙잡을 수 있으니

침묵하지 않으면 나를 말할 수 없다는 말,

참으로 옳지 않은가.

 

(160쪽)

 

 

 

본 것은 전해지리라.

 

운율로 가득한 이 세상,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리라.

 

세상은 이미 완전한 조화 속에 있고,

사진가는 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녹음하는 기사일 뿐이다.

 

각각의 소리를 주의깊게 들으며 조율하자고 다짐한다.

 

창조는 애초부터 사진가의 몫이 아니기에,

귀 기울여 듣고 차분히 기록하는 장인이어야 한다.

 

들은 것은 기록되리라.

기록된 것은 전해지리라.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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