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소설 <푸른 세계>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사나예 2019. 4. 30. 05:59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행복감을 주는 작품

            Aslan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너의 다름을 사랑하라, 너를 유일한 존재로 만드는 것을


사랑하라 (175)


 


 


이 얇은 소설이 이토록 감동이고 여운을 주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그건 이런 점들 까닭이었다.


 


암 투병과 극복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후일담이 아님.


자신이 고통을 겪었다고 자신의 고통만 과대평가 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지 않음.


자신의 특수한 경험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으며 겸허한 태도.


 


더불어서 문학적·예술적인 성취까지 하고 있으니


읽으면서 감탄하다가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어 버렸다.


 


지난해에 한 대만 소설가가 가족의 투병을 기록한 책을 읽으며 몹시 고통스러웠다.


책의 내내 분노하소연으로 점철된 거친 표현들이 감당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런데 <푸른 세계>의 저자는 젊은 작가여서일까.


자신의 고통과 경험을 문학적으로 표현해서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것들이 때로 아름답고, 때로 너무도 투명해서 감탄의 연속이었다.


 


아 이건 감탄할 일이 아닌데 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


 


 




 


소설은 주인공인 가 주치의로부터 앞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병실 룸메이트에게 언젠가 들었던 그랜드 호텔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곳은 가족 연고가 아무도 없고 죽음이 입박한 환자들을 무상으로 받는 호텔이라고 한다.


 


주인공이 몰래 그랜드 호텔로 향해 그곳으로 가서 만나는 사람들, 나누는 대화들, 겪는 일들을 담았다.


주인공의 1인칭 화법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법들이 적절히 섞여 있다.


 


문학평론가가 아닌 보통의 독자인 나는 이 작품을 오롯이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저 비범하다는 것.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죽음의 확률이 살 확률보다 높은, 압도적으로 높다는 진단을 받은 주인공.


작가의 글로 만나는, 주인공 마음 속의 생각들에 곳곳에서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정말 이런 느낌 갖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유럽 영화에서 느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을 승화했다는 말로 형용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그러한 문장들, 이야기, 대화들.


왜 독자들이 작가에게 하루에 8,000통 이상의 이메일을 보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에 스페인에서 발표되었다는 <푸른 세계>


이전에 영화, 드라마, 소설, 에세이로 왕성하고 꾸준히 활동한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비단 나만 모른 것 같지는 않지만)


몇 년 동안이나 모르다가 이제 알고 만난 것이 애석했다.


 


한편으론


어쩌면 가장 적합한 타이밍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작가의 마음과 공명하는 것처럼 몇 년전에도 이러했을지는 모르니까.


 


 




 


지난주 정혜윤 책 리뷰에 고백하였듯이   http://blog.yes24.com/document/11245572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작가에게도 내 작가라는 훈장을 달아드리련다.


 


소설의 내용과 표현 형식이 이토록 잘 어우러지면서 스토리를 구현하는 것에도 대단히 감명 깊다.


 


이제 5월 코앞이지만


내게는 단연코 올해의 소설이었다.


 



 책 에서


 


거리의 소리는 절대 듣지 않는다. 유쾌하지 않아서다. 사람들은 항상 불평하는 대화를 나눈다. 자기 인생이나 파트너, 혹은 일에 대한 불평들. 불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문제라고 생각하면 생기는 거라고 믿는다.



너는 두려워하는 게 지겹지도 않니? 네 행동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 말이야.

우리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 움직인다.



Just a perfect day


you make me forget myself.


아주 완벽한 날, 당신은 나 자신을 잊게 해요.


뭔가 일이 안 풀리는 날에 부르는 <Perfect day>에는 치유의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늘 그 노래가 무척 슬프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그 노래를 제멋대로 연주하는 방식이 노래에 불가사의한 행복감을 불어넣었다.


  (45)


 


나는 너의 사랑을 간직할게,


너의 에너지를, 너의 꿈을,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방식을.


   (62)


 


고갱. ‘자유로운 사람만이 행복하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다. 살기 위해 우리를 살게 하는 이성을 잃어야 하나?


그가 이 말을 했고 내가 그 사람이에요. 떠난 사람은 달리예요. 복잡하고 초현실주의적이지만 자기만의 특성이 있고 천재적인 사람이지요.


    (69)


 


우리는 어리석은 일에 두뇌를 너무 많이 써서 결국 터무니없는 문제 해결에 매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 당신의 본질과 진정한 당신이 등장한다.

나는 초연함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살아가겠지만 계속해서 맹목적으로 찾을 것이고, 나는 안식을 누리고 있다.


    (94)


 


이 여행은 내 인생을 바꿀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105)


 


 


네가 죽으면 잃게 될 것들이 그립지 않을까?”


무엇을 잃는데요?”


공이 내게로 넘어왔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도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섹스?”


난 섹스를 해봤어요!” 내게 대답했다.


소년의 미소에 나는 반신반의했다.


사랑하고, 자녀를 갖고, 다른 사람과 사는 건?”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지금 갖고 있나요? 그것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 앞으로 가질 건가요?


그것들을 그리워할 건가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사는 것은 그립지 않나요? 색소폰 부는 건? 애인을 잃는 건?


허공으로 뛰는 건? 가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가보지 못할 장소에서 어떻게 발음하는지도 모르는 이국적인 음식을 먹는 건? 그런 건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중략) 얼마나 많은 사람이 쾌락의 노예일까요?


최고의 쾌락은 그 어느 누구의 노예도 아닐 때 느낄 수 있어요.”


  (114)


 


우리를 유일하게 만드는 우리의 혼돈을 억누르는 대신 사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126)


 


고통을 겪는 게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단지 사는 것이다.

           (145)


 


조심해서 밟아라,

내 꿈을 밟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고통을 만드는 것이다.


너 자신이 되어라,

남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 정복당할 것이다.

            (157)


 


추구한다는 것은 목표를 필요로 할 뿐 최종 목적지 자체는 아니야.”


그녀를 위해 그녀의 팔에 한 구절을 적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모든 것에 맞설 수 있다.”


  (165)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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