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

뭉크 Edvard munch

사나예 2019. 4. 25. 19:25

 

 

 

 

 

 

 

 

 

뭉크의 작품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연민, 성찰, 철학이 담겨 있다.

뭉크의 그림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사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25쪽)

 

『절규』라는 그림으로 유명하고, 나 또한 그 작품만 알고 있었던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미술사학자 유성혜의 글로 뭉크를 만났다.

뭉크의 그림, 그가 남긴 글들, 인생과 예술 정신을 접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놀라움을 느낀 책이었다.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음은 알았는데 덴마크의 지배도 받았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뭉크는 소재와 표현법에서 다양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그림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오슬로의 옛날 이름이 크리스티아니아 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2차 대전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 뭉크의 그림은 퇴폐 그림으로 몰려서 훼손될 뻔 했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새로 접했기에 놀라움을 안겨 준다.

 

회화에 대해서 특출난 식견은 없는 필자이지만

뭉크의 그림 절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나의 무의식 속에 있던 좋아하는 이유를, 책 한 권으로 ‘해석’ 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참 유익했고 감동을 안겨 주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절규’에 한번도 싫거나 무섭거나 그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친근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음을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그건 직접적으로는 TV 예능 프로에서 무슨 경악스런 일을 묘사할 때 (물론 예능 맥락이다)

자막 캡션으로 ‘절규’의 인물이 자주 등장했어서 그런 영향을 받았다.

 

뭉크가 어느 시대 때 사람인지, 어떤 사조의 화가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절규는 참 정겹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드바르 뭉크의 인생을 읽으니 한층 이 화가에게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동생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

아버지도 나중에 여의게 된다.

여든삶을 넘게 살았지만 일평생 몸이 쇠약하였고, 1908년에는 신경쇠약과 알콜중독으로 7개월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두 번째로 놀라움과 전율을 느낀 건, 그의 작품 세계였다.

절규, 마돈나 외 몇 가지 대표작을 보면 그가 어둡고, 불안한 그림들을 주로 그린 것 같았다.

그런데 습작으로 르느와르 풍 그림도 여럿 그렸고,

아름다운 풍경화도 다수 그렸음을 알았다.

 

전문적인 눈을 가지진 못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모두 수려하고 퀄리티가 있는 그림들이었다.

 

뭉크에 끌리다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반 고흐에 대한 뭉크의 글을 읽고서였다.

두 사람은 고갱과 함께 파리에서 같이 유학한 시기를 공유한다.

 

고흐는 그의 짧은 일생 동안 자신의 화염을 꺼뜨리지 않았다. 그는 예술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불살랐다. 나는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고 그보다 좀 더 오래 살고 있지만,

고흐처럼 생각하고 열망한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내 불꽃들이 소멸하지 않고 불타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를.

(305쪽)

 

책을 통해 알게 된 뭉크의 삶과 죽음,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이러한 표현이 진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유성혜 작가처럼 눈물을 흘리며 보지는 않았지만, 뭉클했다.

낯선 나라, 과거의 천재 화가 한명에게 ‘짠하다’ 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뭉크가 활동한 동시대에 워낙 걸출한 화가들이 많았다.

뭉크는 파리, 베를린 등에서 왕성히 활동하면서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오랫동안 외국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오슬로로 돌아와서, 이후에 30년을 조용히 지내게 된다.

 

‘절규’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그림들이 마음에 쏘옥 들게 되었다.

죽음을 담았지만 시선을 사로잡은 『죽음과 아이』

절규 속 해골 이미지처럼, 도시의 번화가 속 사람들을 그린 『칼 요한 거리의 저녁』.

 

또한 뭉크는 오슬로 대학 강당에 3면에 걸쳐서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 중 ‘태양’도 사진으로 보아도 인상 깊다.

 

생활고에 시달리지는 않았고 작품도 일정 이상 인정을 받았던 뭉크.

그러나 그의 그림들에서는 불안, 우울, 좌절 같은 어두운 감정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감정의 근원과 심연을 표현한 기법들이 참으로 탁월하다.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뭉크의 어두운 그림들을 보면 우울해지지 않는다.

내 속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정화’되고 해소되는 느낌을 준다.

 

대단히 고독하고 외롭고 육체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뭉크.

그가 자신의 재능으로 이러한 그림들을 그려줘서, 남겨주어서 진정으로 고맙다.

 

어떻게 말로 100퍼센트 형용할 수 없는

그림을 통한 감정, 생각을 생성하게 하는 그림들 이었다.

 

오슬로 하면 인기 추리 소설의 무대로 인지하고 있었는데

이젠

 

뭉크가 태어나고, 사랑했고, 고통을 느꼈고,

생의 마지막에 안식을 얻었던 도시로

새롭게 자리 매김 할 듯 하다.

 

 

그가 국민 화가로 인정받는 이유는 척박하고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해온 노르웨이인만의 민족적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5쪽)

 

뭉크의 <절규>는 일그러진 얼굴과 독특한 분위기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강한 인상에 압도당한다.

해골 같은 얼굴에 늘어지고 비틀린 입과 턱, 강한 원색들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풍경은 당시 선호되던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는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절규>는 마치 환상 속이나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55쪽)

 

뭉크의 상념과 고독은 세기의 예술가라서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생각해봤던 고민들과 경험들, 느껴봤던 감정들이다.

그래서 뭉크의 그림을 보면 공감하게 되는 것일까.

(308쪽)

 

 

그는 우리 인간의 공통된 이야기를 보여주고 함께 나누고 싶어 했다. 인간이 일생에서 겪는 생생한 감정들을 다룬 그의 그림들은 시대와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래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뭉크의 그림들은 여전히 큰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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