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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곳에서》제임스 설터 산문

사나예 2018. 9. 12. 03:01

 

8월 중반에 갑자기 날이 선선해진 날이 찾아온 주가 있었다. 그토록 선선함을 바랬으면서도 거짓말처럼 더위가 수그러드니 뭔가 마음이 허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도서관 서가를 여유롭게 거닐었다. 

그러다가 덕분에 이 책을 발견했다.

 

작년에 나온 책인데 그동안 별로 대출한 사람이 없는 듯이 손때가 안탄 모습.

설레임이 더 배가되어 냉큼 빌려 왔다.

 

제임스 설터 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았고 몇 번 도서관에서 책을 손에 잡았다가 다시 꽂은 적이 있다. 이상하게 안 읽히는 책들이 있는데 이 사람의 소설들이 내게는 그랬다.

이 책 《그때 그곳에서》는 제임스 설터의 여행 산문집이다.

기회는 이 때다~ 하며 펼쳐 읽기 시작했다. 한 명의 소설가를 만나는 방법으로 그의 산문이나 여행기를 읽는 것도 좋은 걸 알기에.

 

와 그런데 이 책 정말 대단하다. 

 

사실 제임스 설터가 얼마나 굉장한 작가인지 나는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문장을 잘 쓰는지는 알았다.

 

작가는 20세기 초에 태어나서 2015년 6월에 아흔세의 나이로 타계하셨다. 장편, 단편소설을 비롯하여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여러 분야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했다.

천재적인 작가가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요절하는 일도 꽤 있기에, 이러한 프로필은 작가가 평탄한 삶을 살았음을 보여줬다.

 

와 그런데 여행 산문기인 이 책은 정말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알고 보니 작가의 삶도 꽤 파란만장했다. 특히 영화광인 내게는 제임스 설터가 영화광이라는 것, 실제로 영화인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가왔다.

 

아니, 그동안 제임스 설터의 글을 읽어온 분들. 부럽습니다. 그동안 나만 몰랐던 이런 멋지고 흥미로운 세계를 음미해 오셨던 겁니까~~~. (웃음)

 

이 책의 원저는 2005년에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6월 15일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래도 이제라도 읽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했는지!

 

제임스 설터의 모든 면모가 마음에 들었던 건 (물론) 아니다. 그는 잘 생긴 백인 작가이고, 자신의 분야에서 충분한 인정과 찬사를 받으며 작가 생활을 했다. 게다가 곳곳에서 보이는 마초적인 기질은 백인 + 셀리브리티 와 겹쳐서 영 거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표현력과 문장력이 근사한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여행기이면서도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주는 절묘한 표현력은 단연 최고다.

 

2005년에 작가가 80세였고 글은 1950년대, 60년대, 70년대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현재의 시점하고 교차되면서 현란하게 나오는 대목도 많다. 이렇게 기법이 화려한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때 그곳에서>는 확연히 달랐다.

 

영화의 플래시 백 flash back처럼 유려하고 찬란했다.

아직 한 번 읽어서 감상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겠다. (한숨)

 

앞부분에서는 읽기가 버거웠다. 책의 절반 가까이가 프랑스 여행기였다. 작가는 아내와 함께 몇 개월, 1년 단위로 프랑스에 집을 렌트해서 지냈었다. 요즘으로 치면 제주도에 한달 살기 같은 그런 개념과도 유사했다.

그런데 이 프랑스 이야기 라는 게 어찌나 예찬 일색인지 나중에는 질릴 정도였다.

프랑스가 살기 좋고, 여행하기 좋은 거야 익히 알았지만 또 이렇게 주구장창 풀으니 나중엔 기가 좀 질리더라.

 

그렇지만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곳곳의 이야기가 재밌게 나온다. 그래서 앞의 상당한 프랑스 이야기는 흘려 보내고 또 마냥 빠져들어 읽었다.

 

책장을 덮으면서 ‘이 책 다 좋은데 프랑스빠다’라고 리뷰에 쓸까 했다. ^^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에게, 작가나 예술가에게, 생각해보면 이유 없이 끌리는 장소 한 군데 쯤은 있지 않을까, 하고.

 

그 곳이, 제임스 설터에게는 프랑스 땅이 아니었나 뭐 이렇게도 생각이 되는 것이다. ㅎㅎ

 

 

아무튼 90세로 별세할 때까지 왕성하고 또 퀄리티가 기복이 없는 작품들을 썼다는 제임스 설터. 

 

이 작가를 책 한 권으로 오롯이, 즐겁게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다.

 

강추하는 여행 산문

<그때 그곳에서> 이다. (원제 : There and Then)

 

 

 

( 책에서)

 

 

여름은 이미 사라져 전설로 남았다.

( 111p.)

 

늦가을이었다. 라인 강은 수면이 빛을 반사해 거울처럼 까맸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북쪽으로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열린 바다의 깨끗한 공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 129 p)

 

신이 거의 언제나 그러듯 인간은 때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이 산들도 그런 것 같다.

( 160 p)

 

우리가 사는 것은 삶이 아니다. 영원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아름다운, 삶의 보상 같은 것이다.

( 183 p)

 

사람들은 걷기가 좋다고 말한다. 나는 트위드 재킷에 오래된 모자를 쓰고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홀로 영국 시골을 산책하는 모습을 품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개와 함께.

개는 없었고 3월 말의 영국 날씨는 최고가 아니었지만 나는 어쨌든 가기로 결정했다.

배낭을 메거나 천막에서 잠자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너무 열렬한 건 싫었다.

희미하고 우아하며 체스터턴이 『피크윅 클럽 기록 the Pickwick Papers』 에서 찾아낸

“끝없는 젊음-신이 잉글랜드를 방황할 때의 느낌”과 가까운 감정을 원했다.

( 233 p)

 

 

살았고 살아갈 날.

어떤 날들은 이만큼 좋을 수도 있겠지.

( p.5 )

 

 

흔들리지 않는 번영, 몇 천 년의 부유함. 사유지는 나라와 같고 바다의 거대한 선박과 같다.

사실일까? 에덴 같은 장소가 존재할까? 앞선 작가들이 알았던 세계.

스티븐슨은 바다가 보이는 넓은 베란다의 훌륭한 집에서 살았다. 시칠리아의 피란델로는 그의 집을 지나 있는 곶에 묻혔는데 그곳에선 멀리 아프리카가 보인다.

어쩌면 여행 속에는 늘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찾아 헤메는, 이미 우리 안에 각인된 무언가에 관한 융의 생각이 들어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리 무의식적이지 않게.

(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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