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오 나의 자비로운

사나예 2018. 10. 11. 06:55

 

 

사람과의 만남도 그렇지만 책과의 만남도 첫 인상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지는 않는다.

책의 첫 부분이 좋았다고 너무 기대하지 않고, 살짝 미흡했대도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오랜만에 처음부터 설레이는 책을 만났다.

시인 나희덕의 여행 산문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처음의 다섯 챕터가 정말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뒤를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둘 만큼.

여운을 오래 느끼고 음미하고 싶었고, 그런 후에 비로소 뒤 이어 읽었다.

 

나희덕 시인의 존재나 작품을 모르는 건 아니다. 오래전에 좋아했다가 또 오래동안 잊고 있었다. 문학 커뮤니티에서 늘 소식이 들려왔기에 ‘잘 살고 활동 잘 하고 계시는군’ 이랬다.^^

 

그러다 오랜만에 읽어서일까. 바짝 마른 대지가 반가운 비를 흡수하듯이 책을 읽었다.

책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와 닿았고, 글 한 문장 한 문장이 필사하고 싶었다.

 

거기에다가 영국, 터키, 슬로베니아, 미국, 인도, 스페인,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면서 겪은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는 재밋거리였다.

 

나희덕 시인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것들, 많은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여전히 시 詩 앞에서 열정을 가지며, 겸허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더라.

 

시어만의 매력적인 표현은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을 일깨운다. 

 

하늘, 바람, 동물, 식물, 땅, 자연에 대한 섬세한 인식은 역시 시인은 다르구나 했다.

적요로운 등. 무연히 홀로 생각에 잠겨.

이런 표현이 참 시적이고도 멋스럽다.

 

여행을 통해 터득한 깨알같은 경험들, 독서와 창작을 통한 인문학적 교양은 재미와 유익을 선사해 준다.

 

화려하거나 장엄한 유럽의 유적지에서, 그보다는 그 곳에 있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좋더라, 는 문장에 절로 동감했다.  (65쪽)

 

시인과 떨어져있던 긴 시간 동안에 시인은 이렇게 깊어졌구나, 느낄 수 있었다.

팬이라고 하기에는 쑥스럽지만 앞으로 다시 시인과 같이 호흡하고 싶어졌다. 

 

책 속의 사진들은 허세 부리지 않으면서도 근사하다.

어떻게 설명을 못 하겠네. ^^;

 

이제는 시인의 시를 읽을 차례인가.

안 그래도 이 가을에 읽으려고 시집 몇 권 쟁여놨었는데 거기에 슬그머니 끼워 넣어야겠다.

 

감사하고, 감동하고, 즐거웠던 독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상적 시간에 대항하면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p.59)

 

나무가 바람에 굽은 것처럼, 인간 역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단련되기 마련이다. 고통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들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p.33)

 

그에게는 아직 삶을 버티게 하는 두 가지 무기가 남아 있다. 두 마리 개와 한 권의 책.

개는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일 것이고, 책은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그의 정신을 지켜줄 것이다. 어두워지는 거리에 서서 그를 오래 바라보며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p.28)

 

뒤틀리는 손으로 아주 천천히 숫자 버튼을 눌렀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손가락들은 자주 에러를 냈다. 그러면 친절한 그의 동료가 달려와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물건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들 중에 그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것에 짜증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20)

 

안네의 집 창문들은 모두 당시처럼 검은 종이로 가려져 있었다. 그 위에는 안네가 간절히 해보고 싶었던 일들이 적혀 있다.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고, 휘파람을 불고, 세상을 보고, 청춘을 맛보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p.127)

 

 

내 책상 위에 메모꽂이에는 미국 시인 에이드리엔 리치의 일기 한 대목이 적혀 있었다.

 

-내 삶을 더욱 강인하게 단련할 필요성

-맹목적인 분노는 소용이 없다는 사실

-사람과 만나는 것을 줄일 것

-작업과 고독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할 것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지켜나갈 것

-낭비를 줄일 것

-시에 대해 더욱 치열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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