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불

저질러야 시작되니까

사나예 2021. 8. 22. 14:59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우면서도 외로운 일인지. 175쪽

 

 

한 편의 ‘에세이’로써의 메리트가 무척 많은 책이다.

 

축구 K-리그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양송희씨.

그는 덕후심만으로 ‘남초’의 세계에 뛰어들어 9년차가 된 축구인이다.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된 ‘스포츠레저학부’를 졸업하여 구단에서 일하시다가

서른을 앞두고 훌쩍 영국으로 떠났다.

손흥민이 속한 토트넘의 계약직으로 합격한 것.

이 모든 일을 겪고, 이뤄낸 이가 ‘여성’이라는 점도 시선을 가게 한다.

 

같은 성, 또래들이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은 사람.

이러한 ‘희소성’만으로 책과 주인공에 대한 관심은 한껏 끌어올려진다.

 

저자가 얼마나 축구를 ‘애정’해 왔는지로 시작하여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것의 의미.

 

영국이 얼마나 축구에 미쳐있는지.

낯선 외국 생활에서의 희로애락.

 

이런 여러 가지들이 ‘청춘’의 언어로 서술되어 있다.

순수하고 풋풋한 청춘 성장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기분이었다.

저자가 낙천적이고 씩씩해서 그렇지 그 갈피마다 고충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문체 덕분에

축구와 관계가 없을지라도 빠져들어 읽을 수 있어 보인다.

 

머무는 동안 내 감정 하나 때문에 영국은 아름다웠다가 끔찍했다가를 반복했다.

그래도 감사한 건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던 때의 영국은 아름답다 못해 사랑스러웠다.

앞으로도 살면서 계속 영국을 떠올리고, 추억하고, 그리워하겠지.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에 내 손때 묻은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추억할 거리를 잔뜩 만들어놨다는 사실은 얼마나 낭만적인지. 나는 그곳에 나의 20대의 마지막과 30대의 시작을 고스란히 남겨 놓고 왔다. (180쪽)

 

 

 

요즘 유튜브 시대여서 영국이나 외국에 대한 많은 ‘실상’을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점이 물론 많을 것이다. 환상같은 거 없이 외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SNS도 발달했고 한국이 워낙 아이티 강국이다 보니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즉시 소통이 가능한 시대이다.

그래서 외국 생활에 대한 이전 같은 ‘동경’이 어느덧 사라졌다.

나는 그랬었다.

 

근데 왠 일일까. 작가가 영국 런던에 있었던 것도 불과 몇 년 전인데

왜 이리 낭만적인 건지.

 

어디가 아파서 서러웠던 경험,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카드를 분실하여 다시 만드느라 생고생한 일,

한국에서 친구들이 보내오는 편지와 메시지들을 읽으며 펑펑 울었다는 일화.

모두가, 새삼 울컥하고 미소 지어지는 나를 발견했다.

 

그만큼 저자가 얼마나 외롭고 낯선 일에 뛰어든 것인가를 같이 느끼면서 읽을 수 있어

같이 울고 웃었다.

책을 통해 이런 경험한 지가 언제인지. 그래서 감사하다.

 

저자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길의 고비고비들을 건너온 느낌이 들었다.

 

글로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또 그것을 과감히 블로그로 타인들과 나누어 왔다.

직업을 밝히는 거 자체가 자신을 오픈하는 일이고 ‘튀는’ 일일 수 있다.

그럴수록 정면 돌파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이루고,

이제 돌아와 인천 FC에서 축구를 ‘사랑’하고 있는 저자.

 

저자의 진심, 서른을 막 통과한 이의 성숙한 열정이 나를 건드렸다.

 

얼마전에 올림픽이 있었다. 1년이 연기되었고 많은 것들이 위축된 대회였지만

그 속에서도 ‘스포츠’만의 순수함, 공정함을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저질러야 시작되니까>는 축구의 매력을 제대로 전달하는 축구 에세이기도 했다.

 

이 책은 많은 계층의 이들에게 크고 작은 위안이 될 거라 확신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10대, 꿈에 도전하고 싶지만 용기가 부족한 20대,

자신의 필드에서 정착하기 시작한 30대.

40대 리뷰어도 나만의 의미로 감명 깊은 포인트가 많았다.

이 책을 만나게 되어 즐거웠고 저자라는 존재를 알아서 반가웠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표현들, 재치 넘치는 문장들은

이러한 분야의 산문 읽는 재미를 흠뻑 느끼게 했다.

 

책 중에서

 

실패가 아니야. 쭉 해나간다면 그것은 과정이 되지. ( 232쪽)

 

가끔 지쳐 ‘내가 축구를 왜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반성했다. 왜 하긴! 사는 데 축구가 전부니까! 읽는 내내 저자가 진짜 축구를 사랑하는 게 많이 느껴졌다. ‘나도 질 수 없다, 내가 더 축구를 사랑할 거야’라는 마음이 자꾸 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축구를 바라보는 저자의 애틋한 감정에 공감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슬기 (강원FC 코치) (239 쪽)

 

「 다들 “이분이 여자였어요?”라고 하더라구요. 저에게는 송희씨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시에 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얘기를 안 했나 봐요. 그랬더니 다들 그냥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나 보더라고요.“

단 한번도 내 성별이 걸림돌이 됐거나 고민의 이유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를 듣고는 이 모든 경험을 한 내가, 모두의 편견을 깬 내가 여자인 게 처음으로 자랑스러웠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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