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전설적인 명 저격수 狙擊手
도서관에서 독립운동가 이름들을 하나씩 치다가 가장 먼저 나온 책이라 빌려서 읽었다.
독립군 소속 대장이었던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주역인 홍범도 평전이다.
거의가 모르는 사실들임에 부끄러움을 안고 읽었다. 여러 독립운동가 평전을 집필한 김삼웅 작가의 글이 믿고 읽을 수 있게 했다.
홍범도는 머슴 출신이었다. 노비보다는 상위이지만 백정을 포함해 7대 하층민 계층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홍범도를 낳고 어머니가 며칠 후에 돌아가셨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도 여의어서 홍범도는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로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는 비록 배운 것이 없고 한글만 겨우 읽었으나, 나라가 풍전등화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끝내 망국을 하자 1908년에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본격적으로 무장 의병 투쟁을 하기 위함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1943년 10월에 카자흐스탄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타고난 군인으로서의 자질이 의병 대장으로서 최 적격이었다고 한다.
더불어 신의 한수는 그가 최고의 명 사격수 라는 것이었다.
사격술을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산포수 라고 해서 산에서 들짐승을 잡아서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것이 사격이었다.
읽으면서 묵직했던 것이, 그의 이런 자질은 어쩌면 나라의 부름을 입은 운명적인 게 아니었나 싶어서였다.
귀족과 고관대작들. 가문이 좋고 배운 것이 많은 양반들. 그들은 나라가 망하자, 현실에 타협한 이들이 많았다. 김삼웅에 따르면, 이회영 등 사대부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있었지만 매우 적은 숫자였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평민이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홍범도처럼 하층민에서 뛰어든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홍범도가 다른 독립운동가, 무장 투쟁가들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저평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삼웅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꼽았다. 우선은 홍범도는 사회주의 색채가 뚜렷한 분이었다.
레닌을 직접 만나서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문에 과거에 반공주의 시절에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 다음으로 큰 원인은 홍범도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에 ‘고려극장’을 취재한 kbs 다큐를 보면서 홍범도의 말년을 짧게 알았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의병군인 중 한명이었다는 홍범도.
사격술, 유격 전술이 신출귀몰하여 당시 함경도와 만주 간도에서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고 불렸다는 분.
봉오동 전투, 김좌진과 연합하여 성공한 청산리 대첩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군인.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고, 남북이 분단되었다지만
그 분이 카자흐스탄에서 연극 극장의 수위를 하시며 쓸쓸히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먹먹했었다.
얼마전에 문 대통령님이 이쪽을 순방하시면서 홍범도 유해 송환을 추진한다고 했는데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다.
자유시 참변을 몸소 겪고,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고려인들과 함께 카자흐로 강제 이주 된 홍범도.
척박한 땅에서 묵묵히 삶을 이어가면서, 언젠가 반드시 올 거라 믿은 독립을 2년 앞두고 생을 마감하셨다.
최근에 김원봉에 대한 영화, 책, 뉴스 기사를 보면서 이 분에 대해 깊이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은, 같은 시대를 관통하여서
읽는 흥미와 배우는 감동을 진하게 느꼈다.
많은 이들이 남미의 체 게바라 혁명가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으로 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체 게바라 보다 홍범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물론 저 분도 훌륭하시겠지만,
홍범도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 혁명가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될 말이다.
책에는 당시의 시대상도 자세하게 나온다.
몰랐던 사실들, 추상적으로 알던 역사를 구체적으로 알아서 더욱 좋았다.
책에는 여러 종류, 버전의 독립군 노래가 나온다.
신흥무관학교 노래는 알았는데, 한 노래 가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독립군 노래
1절. 바람 차고 눈 쌓인 만주벌판에
나라 잃고 돈도 없는 불쌍한 신세
간 곳마다 압박 착취 설움이구나
삼천리라 금수강산 다 빼앗기고
우마 같은 노예생활 가이없구나.
2절. 쓸쓸하다 만주벌판 찾아왔는데
일 년 내내 지은 농사 뉘 가져갔나
흡혈귀와 까마귀 떼 피땀 빨아가니
불쌍하고 가련하다 우리 동포야
승리 날을 앞당기어 싸워나가자
3절. 무산대중 두 주먹을 추켜들어라
청년들의 끓는 피를 식히지 말고
승리 위해 이 깃발을 피로 물들여
일본 제국 쓸어내고 승전가 높이
우리 강산 우리 주권 우리가 찾자.
홍범도에 대한 기록은 직접 전우로 싸우신 분들, 재중 역사학자, 소수의 국내 연구자들의 글이 있다.
글들 마다 버전이 다르고, 서로 배치되는 부분도 있었다.
오래된 역사이고, 홍범도가 오랫동안 한국에서 지워졌었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홍범도의 의병 투쟁과 인생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서술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러 기록 중에서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시 문서보관서의 자료를 인용한다.
다음은 김규연의 비망록과 이인섭의 회상기로 마친다.
직업 : 혁명가
이 사람에 대해서는 독자를 사로잡는 책을 쓸 수도 있고, 훌륭한 전기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첫째로 명기할 사항은 ‘직업: 직업적 혁명가’라는 사실이다. 이 사람은 그와 같이 긴장, 궁핍, 그리고 위험으로 가득찬 생을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삶은 노동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불사르겠다는 목표와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알고 증오할 줄 아는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김규연 비망록’에서
홍범도는 평안도 평양 출생이다. 조선이 합방 전 함경북도 의병운동이 극성한 때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등지에서 일본 군대 연락병들을 습격하는 데 명성이 있었다. 그러자 지원군들 모아드니 부대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백발백중의 명포수이고 부대적 편성 지도 능력은 없는 중세기 무사와 같은 장군이다.
1919년 3월 운동이 조선에 발발할 때에 홍범도는 조선에 가서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간도 ‘국민회’에서 군인 한 부대를 홍범도 명의 하에 주었다.
홍범도는 군인부대와 간도에 있다가 마침 봉오골 전쟁에 참가하였고 그 후 백두산 뒤에 갔다가 일본군 간도 토벌 시에 남만, 북만 산으로 피란하여 자유시에 왔다가 자유시토벌에 군대들이 무장해제 당한 후, 홍범도는 단신으로 모스크바까지 행세하면서 자유시 토벌이 유감이 없는 듯이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이인섭 회상기에서
홍범도가 이룩한 위훈에 대해서는 모든 고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그는 모든 고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는 홍범도의 이름이 한반도의 독립투쟁사와, 원동지역 한인 투쟁사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홍범도의 묘지가 크즐오르다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려인들 이외에는 누구도 그에 대하여 모르고 있다.
우선 그의 묘지를 잘 관리 보존하여야 한다. 그 누구도 그의 혁명적 투쟁에 대한 회상기를 러시아말로 쓴 사람이 없으며, 소비에트 단체들에 그의 활동에 대하여 알리지 않은 것이 그 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 봉오동 전투는 <전투>라는 영화로 제작 중이다.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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