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불

Kierkegaard 키에르케고르

사나예 2018. 10. 30. 01:17

 

행복주의 철학에서는 만사를 적당히 하는 게 유익하고 행복에 이득이 된다고 한다.

행복의 관점에서는 사랑, 결혼에서 콩깍지 씌인 사랑은 금물이다. 우정같은 사랑을 권장한다.

 

작가 다미엥에 따르면 행복주의는 행복의 경제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행복철학에서 열정은 어느 정도 이상 자제하라고 조언한다.

열정이란, 특히 사랑에서의 열정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절대적인 것을 갈망하는 걸 의미한다. (p.113)

마음 편한 행복은 열정 옹호자에게는 소심한 타협일 뿐이다.

 

열정은 황홀감을 내포한다. 우리 어른들은 행복하다고 말을 할 때 황홀감을 포기했다.

황홀함을 갈망하는 마음은 열정에 속한 것인데, 그저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황홀감이 필요하지 않다. 황홀한 기쁨보다는 소소한 만족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이다. 황홀한 마음을 채워가는 것을 단념했다 해도 행복은 느낄 수 있다. 누구든 붙잡고 편안한 상태와 천국 같은 황홀한 상태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 물어보자. 상대방은 주저하지 않고 전자를 택할 것이다.』  (p.118)

 

아이들과 달리 성인은 불가능한 것을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이번 생애의 삶이 아닌 다른 생애의 삶은 없다. 그리고 완전한 행복은 현재 살고 있는 세상과 삶에서는 이룰 수 없다.

 

지난 해에 우리나라에서 최대 유행한 말은 소확행이다. 철학자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도 비판거리는 있다. 이는 모험이나 꿈을 제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시대에도 덴마크 버전 소확행이 있었고 키에르케고르는 이를 비판했다.

‘부르주아적인 행복’이라는 추세가 유행했다. 이는 낭만주의로 미화됐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세속적인 이상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부르주아적인 행복에서는 타오르는 열정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논리가 우선이다.

 

하지만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적인 본성이고, 이를 억누르면 개인으로서의 독립성도 기를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부르주아적인 행복을 거짓으로 가득한 ‘속물’의 삶이라고 표현했다.

 

『사람들의 생각은 언제나 거의 비슷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직 나만이 원하는 것이 있기는 한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는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는 숫자, 평범한 인간, 쳇바퀴처럼 반복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 370쪽

 

 

원래 이상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이상을 추구할 뿐 다 이루지는 못한다.

이상은 실현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방향성을 제시하는 가이드다.

 

그렇다고 이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회피하라고 부추긴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유토피아는 완전한 행복이나 완전한 도덕처럼 영원히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상이 없다면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을까? 프랑스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상을 내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속물은 완전한 행복이라는 이상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문제라고 다미엥은 말한다. 속물은 현실에서 사는 데 만족할 뿐 더 이상 별을 바라보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독립성을 타의에 의해서나 스스로 폐기했다. 

순응(順應)주의가 그의 삶의 목표이다. 그래서 시대의 경고를 인식하는 내면의 자원이 없다.

그저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한다.

 

『결국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기분을 즐기기 위해 그토록 사랑에 빠지려고 하는 것 아닐까?』  

( 124쪽)

 

 

지난번 첫 번째 리뷰에서, 작가 다미엥이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개인 중심적’ 사유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걸 썼다.

자아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어떤 상황에서나 자신의 내면만 바라보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이는 ‘개인 지상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개인 지상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망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질 문명, 오늘날의 디지털 도구들은 단지 편리함을 넘어서 절망을 없애줄 거라는 환상을 심어 준다.

마치 풍요를 누리는 게 영원할 것 같고, 자유로움이 무한할 것 같은 인식을 제공한다.

<절망할 땐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풍조를 일깨우고자 한다.

 

요즘 우리가 절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삶에 깃든 비극을 보지 못해서다.

라틴어 ‘파토르 pateor’는 ‘고통스럽다’ ‘견디다’를 의미한다.

「열정」과 「비극」은 어원이 같다. 

우리의 삶에 깃든 비극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슬프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비극이네”라고 말하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비극은 듣기 좋은 말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다미엥 클레르제-귀르노는 말한다.

 

왜냐면, 비극은 삶을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활기차고 서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녁에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묻는 말에는 서정성이나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이 없다.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업무는 그저 단조로운 일상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예술가는 이런 평범한 삶에 관심이 없다. 

예술은 어떤 대상을 다루든 사랑, 죽음, 유한함, 자유, 망각 등 인간의 삶을 주요 테마로 삼으려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우리보다 강렬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존적인 고민을 하며 살기 때문이다.

로베르 앙텔므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경험을 책으로 썼다. 책에 따르면 수용소의 사람들은 저녁시간을 서정적으로 보내려고 애썼다. 한 사람씩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를 암송했다.

 

우리의 삶에 예술이 왜 필요한지가 이해된다. 인간은 예술 작품에 흥미를 잃는 순간 자신의 개인으로서의 독립성도 잊게 된다. 예술 작품이야말로 내면성을 살려주는 친구다.

그렇다면 그 예술 작품의 본질, 핵심은 무엇일까?

 

다미앵은 그것을 비극이 일으키는 감정이라고 보았다. 감동적이고 위대한 예술 작품들에서, 그 안에 사람들의 비극이 담겨있지 않은 작품은 없었다.

물론 몰리에르, 채플린처럼 위대한 희극을 창작한 이들도 있다. 그래도 예술 작품이 근본적으로 비극적인 정서를 담은 감동을 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으면 자연히 기술력을 맹신하게 된다. 마치 인간은 자신이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죽음의 운명을 밀어내며 무한한 자유를 내세운다.

요즘 들어서 특히 우리는 본질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지닌 본질은 그대로인데 외면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이를 받아들여라’는 더 이상 따라야 할 의무가 아니다.

 

기술에 대한 맹신은 환상이다. 그 맹신은 기본적으로 혼란을 가져온다. 기술로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필연적인 운명이 아니라 당장의 불편함만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욕망에 방해가 되는 불편함은 부담스러운 존재여서 즉시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기술은 인과법칙을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과법칙을 기초로 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자연에 순종할 때만 자연을 지휘한다.”

베이컨은 우리가 자연의 법칙을 따를 때에만 자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기술을 통해서 사람이 처한 조건들이 개선되어 왔다. 그런데 이를 면밀히 살피면 또 다른 번거로움이 발생하고 이는 다시 불편함을 유발한다. 끊임없이 개선해 왔지만, 여전히 개선하지 못한 불편함이 있는데 이와는 어떻게 지낼 것인가?

아직 치유되지 못한 환자들, 노인들, 중증장애인들은 예전보다 차가운 시선을 받는다.

이들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을 환기시켜주며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소수자로 취급받는다.

 

당당히 문제를 해결한 자유로운 ‘정상적인’ 인간과는 다른 소수의 예외로 전락시킨 셈이다.

소수자들이 보여주는 한계는 의학의 한계일 뿐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고 본다.

( 137쪽)

 

명작 영화에서나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이들을 가끔 본다.

왜 저 사람들의 웃음은 더 진실되 보일까. 나는 몇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건 웃음이 어려움이나 슬픔을 겪은 후의 모습이어서 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책도 같은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울음이 나올 정도로 슬픈 책이나 영화를 즐겨보는 이유가 있다. 울게 하는 텍스트 속의 불행은 전혀 감동적인 것이 아니다. 작가는 말한다. 감동의 대상은 불행이 아니라 ‘비극’이라고. 등장인물들의 고통은 비극적인 실존의 고통과 관계되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유한함을 알고 비극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제대로 웃음을 지을 줄도 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파란만장한 픽션에, 최신 유행의 음악에 열광하는 건 삶은 평범하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픽션은 픽션일 뿐 실제 인생이 아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을 매순간 픽션을 통해 대서사시 같은 서정성이나, 놀라운 경험으로 꾸미며 지루함을 달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p.145)

 

픽션 속에는 삶의 비극적인 무게를 기적처럼 극복하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오면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기에 우리는 절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라고 작가는 반전 멘트를 던진다.

삶의 열정이란 절대적인 것이 있을 때 비로소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전한 행복이라는 이상을 놓칠 수가 없고, 그렇기에 위대할 수 있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작가는 단언한다. 이상은 실현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상에 걸맞은 모습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아야 한다.

그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행복의 관점이 아니라 윤리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윤리의 관점은 일단 존재해야 의미가 있다. 

존재 存在야 말로 존재하는 사람이 최고로 관심을 갖는 일이다.

키에르케고르를 통해서 윤리적인 자신이 되는 것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부 진단하기, 2부 이해하기에 이어서 3부 적용하기에서는 윤리에 대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들을 살펴본다.

『윤리적인 삶에 깃든 고귀함을 되찾자』.

 

자신의 행동을 외부의 결과에 비추어 평가하지 않을 것을 저자는 요청한다.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또 반드시 하면서 살아간다. 

지나간 선택의 결과가 안 좋은 것이었더래도 너무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면 그 때에 내가 내린 결정은 ‘나의 자유의지’로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윤리와 가치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임을 진다. 하지만 뜻밖에 벌어진 일,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까지 자책할 필요는 없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려주는 지시사항 전체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거짓말은 나쁘니까 하지 마라, 부모를 존경하고 돌보는 것은 좋은 일이니 해야 한다 등을 가르친다. 도덕적인 가치는 윤리적인 이상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요즘 철학자들은 도덕 기준이 상실되었고 방향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경향을 따른다. 전통적인 가치들이 갑자기 불확실해졌다고 보고 이를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생각에 매달린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것도 다른 문화권에 가면 정당한 행동일 수 있다.

 

도덕 가치란 대단히 상대적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더욱 나뉘어있다. 예를 들면 너는 자유를 믿고, 나는 평등을 믿는다.

너는 존엄성 존중을, 나는 생명 존중을 믿는다. 너는 자비와 용서의 필요성을, 나는 정의와 처벌의 필요성을 믿는다.

너는 좌파이고 나는 우파일 수 있다. 너는 안락사에 찬성을, 나는 반대한다. 너는 사형제 완화를, 나는 강화를 찬성한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다.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에서는 그럴수록 당연히 여러 분야에서 충돌한다. 이는 자연스럽고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접점을 찾을까? 우선 이 점에 서로 동의하고 시작해야 한다.

여러분이나 나나 선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 이를 전제로 소통해야 한다. 선을 추구하는 생각에서 우리의 도덕은 일치한다.

 

도덕은 어느 개인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인권은 세계 어디서나 존중하는 가치에 해당한다.

이처럼,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문화, 개인과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인정하는 일이다.

 

다미앵은 이어서 말한다. 우리가 의견이 달라도 도덕적인 삶에 문제되지 않는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각자 도덕과 비도덕의 행동 기준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의견이 서로 다르면 도덕이 발전할 수 있어 긍정적이다.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면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더 나은 도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절망할 땐 키에르케고르》의 저자는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데 그에 도덕도 포함된다. 이 챕터에서 학생들은 엄청나게 지루해한다. 10대가 수업시간에 도덕, 의무 같은 단어를 들으면 이는 바로 어른들의 훈계,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로 여긴다는 것이다.

‘의무를 하다’라는 말은 학생들에게 ‘숙제를 하다’와 동의어이다. 학생들에게 의무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지는 사회적 의무, 과제를 해야 하는 것,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존재를 뜻한다.

 

숙제에서 자유로워진 성인들은 어떨까. 작가는 도덕과 의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은 ‘도덕을 지키는 일’을 ‘개인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각자 공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희생.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 이렇게 개인이 희생한 댓가로 사회는 안정된 환경을 보장한다.

이처럼 도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무이다 보니 우리의 내면생활과는 직접 관계가 없고, 우리가 온전한 자신이 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도덕은 보편적인 법칙이라고 하지만 개인의 특성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려고 세금을 낼 뿐이다.

도덕은 개성을 지운다. 도덕에 따라 모든 아이는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고 할 때 도덕은 여러분을 개별적인 개인으로 보지 않는다.

도덕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을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이지 않을까?

 

물론 일반적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우리 각자 특수한 상황이 있는 개인이다. 상대방에게 쓸데없이 상처를 주는 말이라도 진실을 말해야 할까?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마지막 남은 순간에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알려줘야 할까?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진실을 갖고 관계를 낭비해도 좋은 걸까.

 

도덕은 정치, 경제, 과학과는 또 다른 특징을 갖는 가치이다.

도덕은 보편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하므로 절대로 개인적인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다.

정치인이 정치를 한다는 이유로 규범에서 어긋나면 이를 인정하지 못한다.

주식 투자가가 비즈니스라는 명목으로 도덕 준수에서 예외로 인정받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과학자도 과학을 내세우며 무조건 모든 실험을 다 할 수는 없다.

 

비도덕이란 무엇일까. 이는 쉽게 생각하면 이런 걸 의미한다. ‘되는 대로 행동한다’.

도덕은 삶 그 자체다, 라고 다미앵은 주장한다. 도덕은 실존과 관련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정치를 하든 비즈니스를 하든 도덕적인 의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정치인, 비즈니스맨, 과학자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조건,환경에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반면에 어떤 상황에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다보니 도덕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상으로 남아 있다. 도덕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있기에 우리는 최소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도덕은 여러분이 각자 지닌 개성을 부정하라고 하지 않는다. 도덕이 당신에게 조언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차이점을 활용해 공동생활에 좋게 기여하라는 것이다.

도덕이 충고하는 것은 자신이 남다른 면을 가졌다고 우월감에 젖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닌 개성은 개성일 뿐 그 자체가 끝없이 남과 구별 짓기 위해 키워야 할 가치는 아니다.

 

남과 다른 점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 남과 다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고 보는 생각은 개인주의 삶이 승리하면서 생겨난 결과물이다.

이러한 삶을 살면 언제나 남과 비교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차이점을 오만하게 내세우기 때문에 실제로는 나다운 삶과 거리가 멀다.

 

철학은 나다운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학문이다. 철학에 속한 도덕은 이에 도움을 주는 개념이다.

 

자기를 과시하려는 야심을 쫒는 사람에게서는 개성을 찾아볼 수 없다. 현실에서는 뚜렷한 개성이 아니라 병적인 자기애와 보기에도 딱한 모방만이 있을 뿐이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결국 다른 사람들보다 튀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오히려 개성이 없어 서로 비슷해지니 아이러니다.

 

자신만의 개성을 보호하려면 진정한 자신을 유지해야 한다. (p.210)

즉, 특별한 사람이 되어서 나다워지겠다는 목표를 세워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 특별함으로 빛나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정리해보자.

도덕은 본인이 의식을 못하더라도 결정에 작용하고 있다. 여러분은 도덕의 지침을 따르지 않고서 온전히 자유롭게 개인 취향, 특별한 감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따른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찬찬히 오래 성찰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독자 자신이 하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일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 뻔한 도덕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극단적으로 직업이 마음에 안 들면 주저하지 않고 바꾸도록 한다.

하지만 일단 하고 있는 일은 직업윤리를 갖고 최선을 다해 해내라고 한다.

 

『자신이 가진 남다른 재능을 보편적인 선을 위해 사용하자.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직업을 열정적인 활동으로 만들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저 먹고살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는 재미없는 일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하는 그저 그런 일도 천직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다른 일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직업이 된다.』

(213쪽)

 

마지막인 4부에서는 ‘신의 진정한 존재를 인정하자’ 편.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유신론에 입각해서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실존철학을 살피면서 챕터를 마치고 있다.

 

꼭 종교의 힘을 통해서가 아니더래도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는 마음, 자유는 유한하다는 인식, 완전한 행복을 동경하는 마음은 우리가 살면서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작가는 강조한다. 이 세 가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이해타산적인 행동을 누가 했으면 왜 그런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반면에 누군가 아름다운 이타적인 행동을 했으면 왜 그런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인간이 자기 행복보다 더 고차원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왜냐면 진실을 수호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자칫 친구와 명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없이 범인을 몸으로 막은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통 때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때가 되면 무고한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주변을 돌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감동을 선사하지 않는가. 자기계발 서적보다 깊은 지침으로서 따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우리 모두 완전한 행복을 동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은 종교와 종교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런저런 것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이다. 

아이를 믿는 어머니는 무조건 믿는다. 아내를 믿는 남편도 맹목적으로 아내를 믿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이 믿음이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라 계산적인 투자다. 우선 사람을 믿을 마음이 먼저다.

 

용기를 내어 기대를 가져보자.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 희망이라고 한다. 반대로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 기대를 한다.

의외로,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때는 가능성이 있을 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을 때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꿋꿋이 밀고 나가는 사람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그가 가진 것이 믿음이다.

 

노력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전부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아이의 가치가 더 빛날 때가 있다. 아이를 비싼 돈을 주고 차지한 소유물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로 바라볼 때가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을 정복한 대상으로 보면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생각하지도 못하게 얻은 귀한 선물로 바라본다면 달라진다. 

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노력했겠지만 여러분과 똑같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겸손해 지자. 그리고 신의 섭리로 누리게 된 고마운 행운으로 생각하자.』

( 266쪽)

 

 

마지막 부록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생애를 간략하게 들려준다.

생각한 대로 살고, 경험한 것을 전부 생각으로 승화시킨 철학자들은 철학사에서 흔하지 않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철학자에 속했다.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많은 철학자들이 실존주의 철학은 키에르케고르에게 빚을 졌다고 말한다.

카를 야스퍼스, 장 폴 사르트르, 마르틴 하이데거, 폴 리쾨르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칸트학파, 니체학파 등과 달리 키에르케고르 학파를 내세우는 철학자는 없다고 한다.

 

작가는 이렇게 비유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사촌들은 많았으나 정작 그의 유산을 직접 물려받은 사촌은 한 명도 없는 것과 같다. 왜 그럴까. 키에르케고르는 평범한 철학자가 아니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저자가 보기에 파스칼과 비슷하다. 파스칼과 같은 이유로 키에르케고르도 철학의 이성, 합리를 불신한 나머지 독특한 철학자로 남았다.

 

<절망할 땐 키에르케고르>는 철학교사인 작가의 화법과 철학자에 대한 해석이 좋았다.

처음에는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절반을 넘어서면서 탄력이 붙었고 굉장히 스피디하게 읽혀서 읽는 나도 놀라웠다. 철학 서적이 술술 읽히다니.^^

 

철학 이란 분야가 즉각적인 해답이 아니라 깊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매력 자체를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곳곳에서 이해하지 못한 문단도 많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전작 全作 이 우리나라에서 아름답고 정확하게 번역되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미엥 작가의 말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상을 품어 본다. 

 

출판사 자음과 모음의 ‘~한 날엔 누구누구’ 이 시리즈 좋다. ^^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파스칼,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 편이 나오면 꼭 읽어보겠다.

 

꼭 철학자가 아니어도 뛰어난 사상을 남긴 소설가, 예술가를 다뤄도 멋지겠다.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을 통해서 책을 제공받아서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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