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플립 Flipped

사나예 2018. 4. 11. 21:46

 

 

 

 

그녀에게/그에게 빠졌다.

이 때 flipped 라는 단어를 쓴다.

 

미국 영어 속어라고 하는데 영화 플립10대 소녀가 한 아이에게 푹 빠진 이야기다.

 

어제 이 영화를 보고는 뜻밖에 굉장히 감동을 받았다. 너무도 건전하고^^ 순수하고 틴에이저들의 이야기여서 굳이 글로 감상을 남길 생각은 안 했다. 그런데 보고 나서 한참이 흘렀는데 뇌리에서 자꾸 이 영화가 맴도는 거다. 맛있는 걸 먹고, 흥미로운 TV쇼를 보고, 심지어 가장 좋아하는 심야라디오를 듣는데도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노트북을 켜고 워드파일을 열었다.

 

사랑에 대해서 불(fire)의 비유가 많이 쓰인다. 불꽃같은 사랑, 그 불꽃이 식어버린 허탈함. 같은 식으로.

 

줄리는 다섯 살 때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앞집에는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인 자기 또래의 남자아이가 살았다. 줄리는 수줍어하는 듯한 그 아이가 좋아졌다. 그냥 앞집 아이로 둘은 서로를 처음 알았다.

 

사랑의 불꽃은 언제 일어나는걸까. 그 불꽃의 이유가 뭔지, 왜 그때 스파크가 일은건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줄리가 11살이 되었을 때 그 불꽃이 일어났다.

배경도 평소 같은 집 앞. 햇살이 비치고 미풍이 살살 불던 보통같은 날. 어떤 일로 집안에서 분주하게 일을 하다가 돌발적으로 브라이스가 줄리의 손을 잡게 되었다. 로맨틱한 것이 전혀 아니고 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줄리는 브라이스가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전에도 푸른 눈에 shy하고 늘상 동네서 마주치는 건 똑같았다. 지금도 외모나 성격, 둘 사이의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줄리에게서 브라이스가 달라졌다.

그의 눈이 깊고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보면 당황스러워지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이다.

 

줄리는 기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첫...

그런데 황홀함도 잠시 줄리에게는 애달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스파크가 일어났으니 브라이스에게서도 어서 스파크가 일어나서 자기를 좋아해줘야 했다.

그 동안 줄리가 브라이스에게 특별히 잘해준 것은 없지만, 서로 몇 년 동안 이웃으로 산 사이니까 자기의 마음을 받아줄 듯 했다.

 

눈빛으로 레이저를 쏜다. 적극적으로 선물을 주는 행동을 한다. 늘 매의 눈으로 주시하는 모습으로 줄리는 브라이스에게 저돌적으로 다가간다. 꼭 말을 해야 알겠는가. 줄리도 브라이스도 이제 어엿한 10대인 것이다.

 

브라이스는 처음에는 전혀 모르다가 어느 시점부터 줄리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예사롭지 않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당혹스럽다. 특별하게 미워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나 꼬마 때 알은 줄리는 그냥 앞집 애일 뿐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기가 먼저 대쉬한 것도 아닌데. 왈가닥도 아닌 조용조용한 줄리가 갑자기 자기에게 표현하는 무언의 감정들.

부담스럽다.

    

 

 

 

<플립>은 줄리의 무려 7년간의 짝사랑을 소소하면서 아기자기에게 전개해 간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둘은 서로의 계층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줄리네 집은 전세였다. 마당과 정원은 동네의 다른 집들에 비해서는 형편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브라이스네 집은 중산층의 잘 사는 가정이었다. 브라이스의 아버지는 예전부터 앞집 줄리네를 은근히 무시해왔다. 단지 동네에서 제일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꼬투리를 잡았다.

 

줄리는 7년째 외사랑중이지만 여전히 씩씩하게 브라이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초월하고 달관해서 브라이스가 자기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브라이스를 다른 남자애들처럼 무심하게 보려고 애써도 봤다. 그런데 절대 그게 안된다. 굳게 마음을 먹어도 그와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한참을 얘기하면. 또 정신이 혼미해진다. 상사병인 것 같다.

 

보는 제3자 관객인 내 마음은 타들어간다. 하이고야 줄리아나. 얘를 어째야 해. 이사를 가거나 전학을 갈 수도 없고.

 

그런데 정말 뜻밖에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줄리는 집에서 닭을 키웠다. 닭들이 달걀을 무진장하게 많이 낳아서 처치 곤란했다. 그러자 이웃의 아주머니들이 친절하게도 달걀을 사겠다고 해주셔서 팔기 시작했다. 그래도 양이 충분하게 남았다.

줄리는 브라이스네 어머니가 생각났다. 늘 마주치면 밝게 인사하시고 가끔 도움도 주셨다. 짝사랑남 브라이스가 중간에 걸려 있는게 조금 찜찜하지만 그래도 아주머니한테 달걀을 안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계란을 한 꾸러미 바리바리 싸들고 브라이스 집 초인종을 눌렀다. 브라이스가 문을 열었다. 계란을 대신 전해주었다.

 

<플립>은 줄리의 시선, 브라이스의 시선 이렇게 두 가지가 대등하게 교차되며 진행된다.

같은 일, 동일한 사건을 두고 소녀와 소년의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계란 사건은 안타까운 일의 시작이었다. 브라이스의 아빠가 줄리가 마구잡이로 사육한 닭의 알을 받아오면 어쩌냐고 호통을 친 것이다. 줄리네 집 앞 마당 더러운 거 못 봤냐며. 달걀에 살모넬라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브라이스는 어느날 몰래 줄리의 사육장으로 가서 울타리 구멍으로 줄리가 닭 키우는 걸 몰래 살펴봤다. 특별히 비위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질색했다. 그래서 어느날부터 줄리가 선물하며 건네주는 한 움큼의 달걀을 버리기 시작했다. 아빠가 말한 내용에는 줄리네는 가난뱅이여서 마당이 더럽다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 브라이스는 이 사실을 숨긴다. 줄리가 알면 상처를 받을까봐.

 

그러던 어느날 줄리가 돌아간 줄 알고 브라이스는 분리수거 쓰레기 봉투에 달걀을 담아서 문을 벌컥 열었다. 어우 그런데 줄리가 잠시 머물러 있다가 브라이스와 딱 마주쳤다.

줄리가 왜 달걀을 버리냐고 하자 실수로 떨어트렸다고 브라이스가 말했다. 그런데 봉투 위에 놓인 달걀은 멀쩡하다. 줄리는 사태를 파악했다.

 

줄리는 속상하다. 그래도 부모님에게 말하면 속상하실까봐 말 안 했다. 그러다가 밥 먹을 때 엄마가 왜 시무룩하냐고 물어서 얘기를 하다가 얘기가 나왔다. 엄마는 딸을 이해하면서 남편에게 가난의 불편함을 토로하면서 울컥했다. 우리도 남들처럼 정원도 가꾸고 고장난 세탁기도 바꿨으면 좋겠다고.

줄리 아빠가 집에 돈을 많이 못 벌어주는 이유가 있었다. 줄리 아빠의 동생, 그러니까 줄리의 삼촌이 정신지체 장애자였다. 그래서 시설에 가 있는데 그곳이 회비가 비싼 사설이어서 줄리 아빠는 수입의 절반 이상을 동생을 부양하는데 쓰고 있었다.

<플립>을 보면서 남편과 아빠의 헌신을 이해하고 견뎌주는 줄리와 가족들이 참 따뜻했다.

 

 

이후에 줄리와 브라이스 사이에 극적인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무엇보다도 어느 시점부터인가 브라이스도 줄리를 다른 눈으로 보면서 이야기가 돌변했다.

 

줄리는 브라이스를 향한 마음을 서서히 접기 시작하는데, 브라이스는 반대로 줄리를 애틋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뒤에 있는 두, 세 가지의 굵직한 사건들은 계기가 되기에 스포일러 일 수 있어서 생략한다.^^

    

 

 

 

둘 사이에 오해가 싹트기 시작하고, 진짜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서 줄리는 브라이스를 완전히 놓아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학교의 행사로 남학생 낙찰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영화의 배경이 1963년인데 지금 보면 조금 유치한데 그때는 고등학교에서 저런 행사를 열었나 보다.

 

브라이스가 바스켓 맨으로 뽑혀서 강당에서 소녀들의 낙찰을 기다렸다. 학교에는 퀸카이지만 싸가지가 없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애가 최근에 남친을 뻥 차더니 돌연 브라이스에게 관심을 보였다. 줄리에게는 숙적이었다.

 

낙찰에서 그 여자애가 브라이스를 선택했다. 줄리는 원래 그럴려던 게 아닌데 브라이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엉뚱한 남자애를 선택했다.

학교의 식당 휴게실에서 그 행사에 참가한 아이들이 데이트를 하면서 점심 식사를 했다.

 

줄리는 줄리가 고른 남자애와, 브라이스는 자기를 고른 여자애와 각각 식탁에 앉았다.

하필 자리 배치는 바로 옆 테이블. 줄리의 눈에는 브라이스가 보이고, 브라이스의 시선에도 줄리가 훤히 보인다.

 

그 이전의 한 사건을 통해서 브라이스는 줄리에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이후에 다행히 심각한 오해는 풀었지만, 브라이스는 줄리의 눈빛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늘 자기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눈이 아니라 냉랭하게 식은 남남의 눈빛이었다.

 

브라이스의 앞에는 학교 최고의 퀸카애가 있었지만 그애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앞쪽의 줄리를 바라봤다.

 

줄리는 처음에만 브라이스를 의식했다가 깡그리 무시하면서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이 일도 소녀와 소년의 시선으로 각각 두 번 사건을 재현한다. 어찌나 흥미롭고 짜릿하던지.^^

 

브라이스가 갑자기 벌컥 일어났다. 휴게실 아이들이 전부 그를 쳐다봤다.

브라이스의 속 마음 대사가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줄리. 왜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거야.

나 아닌 다른 남자애 앞에서 왜 그렇게 예쁘게 웃고 있냐고.

 

갑자기 다가온 브라이스에 줄리는 깜짝 놀랐다. 좀 보자고 해서 일단 일어나기는 했는데 브라이스가 갑자기 성큼 다가왔다. 무작정 키스를 하려고 했다.

줄리는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학교 주차장에 있는 자전거를 타고 온 사력을 다해서 페달을 밟아서 집에 왔다.

 

엄마는 딸이 학교 시간에 갑자기 울면서 들어와서 놀랐다. 왜 그러냐고 묻자 줄리는 침대에서 울면서 브라이스 얘기를 했다.

 

브라이스도 그 길로 학교를 나왔다. 줄리네 집을 문을 두드렸고 엄마가 문을 열었지만 미안하구나 줄리가 나오고 싶어하질 않아 해.’라고만 전해들었다.

이틀을 꼬박 전화를 하고, 집 대문을 부서져라 두들겼다. 줄리는 외면했다.

 

삼일 째 되던 날에 줄리도 충격과 슬픔이 잦아들었다. 그 날은 브라이스가 찾아 오지 않았다.

줄리는 안도하면서도 계속 바깥을 살펴보게 되었다.

 

, 그리고 엔딩의 장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설정에 나는 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역시 예기치않게 눈물을 쏟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줄리와 브라이스. 1963년의 수줍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들을 보면서 한참 영화를 따라갔었다. 그러다가 잊고 있던 하나의 설정이 엔딩과 연결되면서 반전이 되었다.

그 반전은 사랑의 연결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의미로 기능하는 거였지만, 그럼에도 참신했다.

 

별 것 아니라면 정말 별 것 아닌 10대의 사랑 이야기.

그렇지만 내게는 재미있고 새롭고 의미가 있게 다가왔다.

 

그동안 10대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는 대만 영화들이 전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 영화로 보니까 꽤 신선하게 다가온 것 같다.

 

주인공 아이들, 그들의 부모, 장애인 친척, 인자하신 브라이스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줄리네의 형편을 알아서 먼저 다가와 달걀을 샀던 이웃들까지.

 

지극히 평범한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 훈훈했다.

 

미소를 지으며 본 <플립>이었다.

 

 Aslan 예스24

 필름 스피릿  Film Spi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