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자라나게 하셨나니

사나예 2019. 6. 28. 01:18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이런 일은 우리가 은사 그 자체를 구하기보다는 서로를 섬기는 일에 집중할 때

일어날 것입니다.」

(67쪽)

 

 

아니 이 책을 완독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책을 작년 이맘때 구매하고 앞부분을 읽었다.

 

1년동안 책꽂이에서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가를 몇 차례 반복.

그러다가 어제 다 읽을 수 있었다.

 

1세기 로마의 시민 푸블리우스. Full name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아미키우스 루푸스.

주인공으로, 그의 시점에서 그리스도인 가정을 방문한 하루의 이야기다.

 

책장을 덮으면서 내가 책을 다 읽는데 장장 1년이 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푸블리우스의 마음이었던 거다.

푸블리우스는 친구 글레멘드, 유오디아의 추천으로 이른바 「그리스도인 예배」를 참석하게 된다.

 

들은 풍문이 있었기에 이런 저런 선입견이 있었고 호기심도 컸다.

그래도 호의적이었기에 발걸음을 옮기게 된 푸블리우스.

아주 얇은 이 책을 나는 너무 기대감을 가졌었나 보다.

 

책을 읽기 전과 후에 뭔가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줄 것 같은 느낌적 느낌?

푸블리우스처럼 가볍게, 약간의 설레임을 안고 읽었으면 좋았을 것도 같다.

 

푸블리우스가 예배 모임에 참석하고 끝까지 있다가 배웅을 받고 나오는 저녁으로 소설은 끝난다.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시리즈였다.

푸블리우스가 신도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인 모임을 다시 찾아가는 이야기가 다음 권이라고 한다.

그 책도 번역되어 나왔으니 구매해서 읽어봐야 겠다.

 

어쩌면 이런 느낌이 작가 로버트 뱅크스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떤 극적인, 맹목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평범한 로마 남자가 경험하고 느낀 바를 독자에게 담담히 전하는 것.

 

선교를 하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이 자극적인 말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는 이런 것이다』라고 그냥 보여주는 것.

이같은 생각이 책을 읽고 들었다.

 

문득 예전 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이 떠올랐다.

지금은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셔서 뵙지 못하지만

내가 참 환대를 받았구나 라는 걸 새삼 느낀다.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에서처럼

새로운 신자라고 해서 특수하게 대접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예의를 갖춰 주셨다.

나에게 경계선을 두지 않으셨었다.

가정에 자주 초대하셨고 같이 식사하고, 개인적인 삶을 공유 하셨었다.

 

그 20대 때 미처 다 깨닫지 못하였는데

지금에서야 그분들의 개방적임을 느끼게 된다.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기에 자신의 허물이 다 드러날 수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속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이끄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인 모임의 모범이었다.

 

오늘날에는 잘 차려진 공간에서, 주어진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성도간에 교제를 나눈다.

초대 교회 성도들보다는 서로간의 삶의 경계선이 확고하다.

프라이버시란 명목 하에 서로간에 벽이 있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스마트폰 메신저도 있지만

교회 바깥에서 우리들은 얼마나 서로의 삶을 오픈하는 걸까.

 

책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심오하지 않다.

담백하게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어느 하루 모임을 묘사한다.

 

푸블리우스는 아굴라 부부의 집을 나오면서

그들이 특출난 건 전혀 없지만, 거룩한 무언가가 감지됨을 느끼게 된다.

 

앞으로 그가 친구들, 그리스도인 리더들의 권면, 사람들의 위로와 기도를 받으면서

어떻게 신앙으로 한걸음씩 걸어들어갈까.

 

잔잔하면서 살짝 흥분되게 기대가 된다.

 

이 책의 젊은이처럼

일상속에서, 편안한 호기심을 가지고 종교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책 中에서〉

 

『걸으면서, 나는 오후에 집을 나선 후 일어난 일에 대해 돌이켜 보았다.

내 예상과는 아주 달랐지만, 대체로 그날 저녁이 즐거웠다.

그들이 어떤 예절을 무시할지, 어떤 신조를 고수할지, 광신에 빠져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만찬 중은 물론 만찬 후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대화에는 이상하게도 그 자체로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의 행동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73쪽)

 

 

『아굴라가 말하기 시작하자 모두가 편한 자세로 앉았다.

은사들에는 서로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신에 대해서나, 서로에 대해서나, 세상에서 맡은 책임에 대해서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나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은사도 있다고 했다.

 

교인들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도와주거나, 사람들을 조화롭고 응집력 있는 모임으로 결속시켜 주는 은사도 있다고 했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거나, 질병과 같은 신체의 필요를 돕는 은사도 있다고 했다. 너무 심오해서 일반 언어로는 옮길 수 없는 것을 그들의 신에게 전하거나, 다른 사람이 전한 것을 설명하도록 돕는 은사도 있다고 했다.

 

모든 은사가 합력하여 삶의 모든 면에서 참석자 각각은 물론 모임 전체의 성장을 위한 자원을 제공한다고 했다.』

(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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