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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속에 있는것

사나예 2020. 3. 20. 21:33

 

 

 

 

〈그 시절, 2층에서 우리는〉

만국의 덕후들이여 단결하라!

 

  얼마전에 <픽셀 pixel>을 두 번째로 봤다. 80~90년대 오락실 스틱 게임을 평정했던 주인공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 우주에서 외계인들이 침공을 했는데 그 수법이 오락기 게임 속 내용이었고, 주인공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미국을 구하게 된다.

처음에 봤을 때는 황당무계한 코미디로만 봤는데 다시 보니까 꽤 진지했다.

대사로도 ‘게임 덕후’라는 말이 나오는데 미국에서 그랬을리는 없고 우리나라 번역가의 센스에 웃음이 터졌다.

덕후, 덕심, 덕력. 이는 모두 일본어 오타쿠를 우리식으로 바꿔서 활용한 말들이다.

<픽셀>에서 주인공은 백악관의 호출을 받고 가면서 외친다. “게임 덕후 외길인생 20년만에 드디어 빛을 보는구나!”

 

오타쿠라는 말은 일본의 하위 문화 즉 서브컬처에서 유래했다. 오타쿠의 중심에는 만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오쓰카 에이지는 1980년대 오타쿠라는 말도 없던 시절에 그 선봉에 있었다.

 

도쿄 신바시에 자리한 어느 만화 잡지사. 이 건물의 2층에서 시급 450엔을 받고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저자는 그 하나였다. 그들은 아무도 못말리는, 만화에 대한 덕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고 서로를 ‘주민’이라고 불렀다.

 

<그 시절, 2층에서 우리는>은 그 시절로부터 시작한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를 탐색하는 책이다. 순수한 열정을 불태웠던 이들이 어떻게 코믹북, 애니메이션 부흥의 저변을 이뤘는지를 살펴본다.

 

저자를 비롯한 무명의 애호가들인 새파란 젊은이들. 뜨거웠던 시절을 저자는 그리움을 담아 회상 回想해 간다.

책장을 덮으며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듯해 감명깊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의 이야기를 방대한 취재, 아카이빙, 자신의 교우관계를 총동원하여서 펼쳐놓는다.

 

잊고 있던 애니메이터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들에 관해 몰랐던 일화들이 쏟아져 흥미진진하다. 그야말로 전설 레전드들인 이름들이다.

데즈카 오사무, 타카하다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안노 히데아키.

 

어렸을 적에 방영한 TV애니메이션들도 소환되어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은하철도 999’ ‘미래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

그리고 여러 극장용 장편 애니들. ‘나우시카의 바람계곡’ ‘공각 기공대’.

 

이렇게 거론한 애니메이터들, 작품들은 나에게 익숙하고 즐겼던 영화들이다.

이들의 거의 한 50배 정도로 처음 듣는 창작자와 작품들이 빼곡이 거론되고 있다.

‘도라에몽’이 1980년에 시작되었고 ‘은하철도 999’가 1979년 작품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은 장르가 다양했고, 나는 미처 몰랐지만 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 숱한 팬덤 문화를 형성해 왔다.

SF 걸작이 많았고, 유럽문화를 해석한 교양 장르물도 많이 제작되었다.

저자는 ‘빨강머리 앤’을 대표적인 교양소설적 애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튜브 영상이 많아지면서 언젠가 은하철도 999를 설명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봤던 단순한 오락-모험기가 전혀 아니었고 엄청난 세계관을 그린 작품이어서 놀란 적이 있었다.

 

지금은 ‘너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 정도가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부흥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10대 20대 젊은이들이 순수한 정열만으로 애니에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무장하여서,

자발적이고 열성적인 팬 활동을 한 ‘역사’가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책에서 다룬 애니메이터들은, 일본의 참 예술가면서 지식인들이었다.

사회와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바라보고, 작품표현을 통해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그들이 존재하기에 일본의 대중문화가 지탱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들, 어른이다.’ (514 page)

 

 

- 책에서 -

 

《미디어 세계가 산업화되어 제대로 된 기업이 되기 직전, 당시의 출판사와 애니메이션 업계는 자신들 내부에 반드시 소속되어 있지는 않은 일종의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장소의 존재를 허용했다. 그것이 도쿠마쇼텐의 2층이었다.》

(474쪽)

 

《강조하고 싶은 건, 내 인생에서 그만큼 즐거운 나날은 없었어요.》 (513쪽)

 

《2층 주민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브라운관 속 명장면이나 캐릭터의 표현을 기록으로써 남겨두고, 재현하고 싶은 마음에 애니메이션 잡지에 정열을 쏟아부었다.》

(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