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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사나예 2019. 10. 2. 14:41

요즘은 도시락을 벤또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사라진 우리말이 한, 둘이 아니거든요.

    (대사에서)

 

‘세계의 3,000개의 언어 중에 자국의 사전이 있는 언어는 20여개 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은 2차대전이 끝나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 중에 거의 유일하게 자국의 언어를 지킨 나라 이다.‘

 

 

물이나 공기처럼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우리말.

 

일제 강점기에 통치자들은 우리의 말을 어떻게든지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다.

창씨개명 이라는 만행을 저질렀고,

김 金 이라는 조선의 성은 가네야마 라는 생뚱맞은 성으로 변질되었다.

 

김판수는 까막눈에 독립운동은 관심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소에 들어갔다가 조선어학회 일로 수감된 조갑윤 선생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에 심부름꾼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영화는 엄유나 감독이 각본을 쓴 <택시 운전사>와 공통 분모를 갖는다.

평범한, 대학생들의 데모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택시운전사 김만섭.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독일 기자와 광주행을 하다가 각성을 하고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김판수 (유해진)도 그랬다. 까막눈이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고, 그래서 어학회 대표 류정환이 한글을 배우라고 했을 때 귀찮아만 했다.

마지못해서 가나다라,를 배우고 한달 후에 한글을 겨우 뗐다.

 

그는 서서히 조선어학회 사람들에 녹아들면서 그들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김판수 동지’가 되어 간다.

 

<말모이>는 김판수가 류정환과 동지가 되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사건을 전개시킨다.

그래서 자연스럽고, 조선어학회를 잘 모르는 현대의 많은 이들에게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는 1941년을 배경으로 한다.

암흑이 짙어졌던 시기였다.

극중의 친일파의 대사에서처럼 ‘이런 지가 30년. 너는 독립이 될 거 같냐?’는 자조가 미세먼지 보다도 더 자욱하게 퍼졌던 때.

이광수, 윤치호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되면서 나올 때는 충격을 던져준다.

 

신문과 언론에 ‘황국 신민이 되자’고 글을 실었던 변절자들.

내선일체에 박차를 가하고, 천황 폐하의 은혜에 보은하기 위해 젊은 청소년들을 전장으로 내모는데 나팔수가 되었던 사람들.

 

의열단, 임시정부 등 외국에 기반을 둔 독립단체들에서는 치열하게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조용히, 우리말을 수집한 분들이 있었고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명맥을 이었던 이들이 있었다.

 

영화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명한다.

 

놀라운 건, 중요한 결말의 한 설정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라는 것.

 

일제는 집요하게 감시해서 우리말의 원고가 실종된 상태였다.

해방이 되었으니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 되지만, 10년 이상의 피땀이 어린 원고의 분실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독립을 하늘도 도운 걸까.

 

경성역, 즉 서울 역사의 건물 보관소에서 소중한 핵심 원고가 해방 직후 발견된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가 되었고, 이 원고 뭉치를 바탕으로 완벽한 우리말 사전을 펴내게 된다.

 

한글을 창제해주신 세종대왕도 위대하지만, 그 말을 가꾸고 다듬어서 현재의 편리한 한글을 만든 분들의 노고도 못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러한 생각이 이번에 다시 보면서 들었다.

 

<말모이>가 가치있었던 건  묻혀진 사건을 발굴한 것도 그렇지만

이 업적이 한, 두 사람이 단기간에 걸쳐 이룬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서 였다.

 

최소 10년 이상을, 제주도부터 함경도까지 조선팔도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조선어 큰 사전은 제작되었다는 것.

 

대중적인 배우들이, 진심을 담아서 연기한 덕분에

영화는 감명 깊을 수 있었다.

 

또 다시 보니 더 재미있기도 한 영화

<말모이>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