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 교수의 신간 에세이가 나왔다.
한동안 에디톨로지를 도서관에서 빌려보려고 애를 썼었는데 신기하게(?) 언제나 대출 중 이었다.
그래서 서너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잊고 있었다.
그 사이에 김정운씨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그림 유학을 다녀와서 여수시로 내려가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얼마전에 블로거분 글에서 김정운 책 이야기를 하다가 일본 유학 가셨다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한참 전에 여수로 내려가셨고 아틀리에 작업실 까지 마련하고 계심은 또 처음 알았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흐른 것일까.
하긴 촛불집회, 탄핵, 대선 이후 2017년 5월부터 지금까지 정말 시간이 빨리 흐른 것 같긴 하다.
글에서 음성이 지원되는 줄 알았다. (웃음)
그만큼 저자는 말하듯이, 글을 쓰고 있었고 그것이 문장에 자연스러움을 톡톡히 부여하고 있었다.
김정운 교수는 다른 논객 論客 들과 다른 자신만의 개성이 분명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는 솔직함, 미학적인 이야기, 박학 다식함 같은 것들이 있었다.
거침없는 표현을 예상하고 또 어느 정도 기대는 했는데
첫 장부터 이 표현 나오신다. ‘젠장!’ ㅎㅎ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는 김정운의 에세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학구적인 면모가 컸다면, 이번 산문집은 좀 개인적인 내밀함이 자리한다.
그래서 가독성이 대단하게 수월하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심리학의 이론들, 저자만의 생각들, 직접 그린 그림이 더해져서
에세이로 읽는 맛이 있었다.
허허실실한 아재 개그들은 적당한 경계선을 유지하면서 독자에게 피식 웃음을 선사한다.
요즘 이기호의 소설집을 읽고 있는데, 약간은 그런 느낌이랄까.
이기호보다는 좀 더 음담패설에 능하시긴 한 것 같다. ^^;
가족도 말렸고 주변에서도 말렸다는 여수의 작업실.
그 작업실을 마련하기까지의 일들은 때로 무용담처럼 펼쳐진다.
작가가 어떤 일을 겪었든지 간에, 독자로서는 한발짝 떨어져서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쩌면 이러한 무모한 듯한 도전, 모험이 ‘작가’의 권리인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무나, 누구나 쉽사리 감행하지 못하는 일들을 책으로 읽고 싶은 것이다.
웃기기만 한 얘기들만 있진 않았다.
자신이 너무도 간절히 원해서 마련한 공간이지만, 또 어쩔 때 한없이 밀려드는 외로움 이야기는 왠지 공감이 갔다.
또한 ‘내 친구 귀현이’라고 지칭되는 작가의 절친 분의 별세는 짠하게 다가왔다.
남들이 마냥 부러워할 만한 자신만의 공간도, 그것을 마련하기까지의 노고는 차치하더라도
실제로 거기서 살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바다 하면 역시 동해, 제주도지 그런 막연한 서열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진짜 오래 바라보기에는 여수 앞바다가 짱이라고.
모름지기 바다는 ‘뻘’이 있어야 한다는 저자만의 논리이다.
아름다운, 때로는 아스라한 사진들을 보면 이 또한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갔다.
외따로 떨어져있기에 깊이 사색할 수 있고, 마음껏 놀아볼 수도 있다.
저자는 그러한 공간을 슈필라움 Spielraum 이라는 독일어로 명명한다.
Spiel 은 놀이 라는 뜻이고 Raum 은 공간이다.
처음에는 낯설지만 읽을수록 뭔가 독특한 감이 오는 단어였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의 전체 이야기는 결국 스필라움에 대한 이야기 였다.
저자 자신이 찾아나서고, 만들고, 구현하고, 한바탕 누리는 공간. 슈필라움.
한국의 공중파 TV에 리얼리티를 표방한 관음적인 프로가 많다는 대목에 공감이 갔다.
도대체 왜 연예인의 거실의 풍경을 바라봐야 하는지 황당하다는 작가.
김정운의 진단은 예리하면서도 문제의식을 지니고 꼭 짚어주는 맛이 있다.
더 나아가서, 관음증은 자신의 방향과 위치는 철저하게 숨기고 그저 타인의 삶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공유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띈다. 나를 오픈하고 상대도 오픈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숨기고 상대만 오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오래 지속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은 ‘관음 사회’가 되어버린다.
이 기저에는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부재’한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대목에서 절로 수긍했다.
한편으로 <극한직업>이 예상을 뛰어넘어 흥행한 것에는 공유함의 의미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거창하고 비장한 건 아니지만, 한 공간에서 순수한 웃음을 공유하면서 깔깔 대는 것은 오히려 건강한 문화의 향유인 것 같다.
작가는 아주 작심을 했다. 미역창고 美力創考 라는 작업실을 마련하고, 내친 김에 배까지 구입했다. 요트나 그런 배는 아닌 작은 배지만, 김정운씨는 면허까지 따시고 직접 배를 몬다.
해안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배를 타고 나가서 보는 바다는 또 다르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직접 운행을 하다보니까 책임질 부분도 있다. 귀환하려면 물때를 알고 늘 챙겨야 하는 것이다. 이 물때에서도 작가의 생각은 확장된다.
‘물때’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살다 보면 ‘물 때’와 같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이 들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다. 잘될 때가 있으면 안될 때가 당연히 있다. 이 ‘물 때’와 같은 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조급함’이다.
(42쪽)
나는 섬에서 오래 살아본 적은 없지만, 섬에서 생활하는 것의 멜랑콜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김정운이 섬에서 살려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이해했다.
단단한 무엇이 있지 않으면, 섬 생활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읽으면서 ‘이건 김정운 버전 이효리잖아’라고 생각하는 잘나 딱! 그런 비유가 나왔다. ㅎ
나는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한동안 이상순, 이효리 커플 방송이 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외면은 했지만 그들의 삶의 스타일과 히피적인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진 것은 어렴풋이 느꼈다.
저자는 유시민이, 혜민 스님이, 이상순이 부러운 적이 있음을 ‘툭 까고’ 고백한다.
김정운의 이러한 표현들이 왠지 얄밉지 않고 솔직해서 괜찮았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솔직함 인 거지 무례함, 개념없음이 아닌 거다.
가끔, 무례없고 예의없으면서 이를 솔직함으로 표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최근 몇 년동안 아들러 심리학이 인기가 있었는데, 심리학자인 작가의 글을 통해서 그 이유를 읽는 것도 흥미로왔다.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취향들이 소통하는 사회가 건강하고 바른 사회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이러한 목소리를 높인다. 한적한 멀리에서 보기에도 우리 사회의 분열적인 모습들이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창조적인 사회는 『감각적 경험의 교차 편집이 일어나고,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 풍요로운 사회』다.
상식 common sense 은 라틴어의 공통 감각 sensus communis에서 파생했다.
특정 감각만이 절대화되면 상식이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다.
정치 성향에 따라 신문 방송, 유튜브와 팟캐스트로 극명하게 나뉘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분노, 적개심을 야기하는 파괴적인 정서가 아니라, 관심사와 취향을 공유하며 교차되는 공통 감각적 경험이 절실하다고, 작가는 조심스레 제안하였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인생을 바꾸려면 공간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공간은 그저 비어 있고 수동적으로 채워지는 곳이 아니다. 공간은 매순간 인간의 상호 작용에 개입하고,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공간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긴다.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도 생기고, 봐줄 만한 매력도 생기는 거다.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아, 자기 전에 그 공간에서 하루를 성찰하며 차분히 기도도 드려야 한다. 자다가 아예 영원히 잠들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이미 여럿 그렇게 갔다.
(206쪽)
툭! 아무렇지 않은 듯, 아재 개그인 듯이 심상하게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들.
인상적인 그림들과 아름다운 사진들과 함께 읽어가노라면 조용히 생각할 수 있게 하였다.
빠듯하게 사는 현대인, 샐러리맨으로서 작가처럼 미역창고를 바닷가에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은퇴 후의 유일한 로망으로 삼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저자의 글을 보며 마냥 부럽다거나, 열패감이 든다거나 그렇지는 전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그림 창작과는 무관한 취향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만의 ‘슈필라움’을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솔직하고 충실하며
권태나 환멸에 빠지지 않을,
중년과 노년까지 꿈꿀 수 있는 그런 인생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없이 읽으면서도 재미있고,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는 에세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였다.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