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당황스럽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고 구글을 검색했다가 박열의 전향 사실을 접했다.
박열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려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바뀌어서 지바 형무소에서 22년을 복역했다.
그런데 1936년에 명백한 전향을 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이제훈을 통해서 느꼈던 감동이 순삭되는 듯 하다. ㅠ
그냥 어물쩍 전향을 한 것이 아니고, ‘내선일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해서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이후에 일제를 찬양하는 발언을 이어가며 국내에 알려져서 빼박 전향의 기록을 남겼다.
허탈하다.
영화를 보고 감격했던 느낌이 빛 바래지는 것 같다.
박열은 스물여섯에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일제에 저항했다.
그가 재판에 회부되면서부터 ‘저항운동’이 시작되었고, 공판 과정들에서, 기결수로 전환되어 수감 생활을 할 때까지 발언한 것들은 너무도 패기가 넘쳤다.
소설 <아나키스트 박열>에서는 영화에서 이미 보았던 그 외침들이 세세히 적혀 있었다.
그래서 벅차게 감격하면서 노트에 받아적었다.
『조선 민족은 결코 일본화되지 않을 것이다. 일본 정부가 선전하는 대로 일본인과 조선인은 융화될 수 없다. 조선인은 일본제국이 말하는바 선량한 신민, 즉 노예가 되기를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본 천황을 살해함으로써, 일본 민중이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여기는 종교적 존엄을 땅으로 끌어내려, 그것이 허황된 우상이자 비지덩어리와 같은 작자라는 진실을 알리는데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220쪽. 박열이 일본 검사에게 진술한 것)
책을 읽고나서 박열 만큼이나 가네코 후미코도 존경심이 들었다.
그런데 변절 사실을 처음 듣고 나니, 반대급부로 후미코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이니치이며 도쿄경제대 교수인 서경식도 후미코를 높이 평가하는 사설을 신문에 썼다.
후미코가 박열을 조력한 데서 머문 게 아니라고 한다.
자신만의 사상을 투철히 확립한 아나키스트 여성이었다.
박열의 추종자가 아니었고 보좌역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
영화를 볼 때도 놀란 사실이 있었다. 1920년대 엄중한 시대에,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 아나키스트 중에 천황에 대적한 세력이 있다는 대사를 들었다.
소설 <박열>에도 그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같은 동족인 일본사람으로서 천황을 살해하려고 모의했다니, 이것도 대단한 일을 한 분 같다.
소설은 박열의 시선, 후미코의 시선, 그들을 변호한 변호사의 시선으로 다채롭게 전개된다.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은 것은 2년의 재판기록 뿐이지만,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가 삶을 마쳤다.
언제 그녀가 직접 썼다는 책도 찾아 봐야겠다.
후미코가 감옥에 잡혔을 때부터, 일본 전역에서 영치금이 쇄도하여 계속 답지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괜히 뭉클했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도 무척 존경스러운 인물이셨다.
얼마전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스파이 브릿지>를 보고 제임스 도노반 변호사에 감동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한 그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붙잡힌 소련의 첩자를 변호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비록 적이지만 인권에 기초하여 피고인을 변호한 그의 일대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후세 다쓰지도 소설에서 보면 박열, 후미코를 변호하면서 우익 세력들의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자신은 물론, 아내와 가족들을 위협하는 이들도 있었다.
후세 변호사는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면서 박열과 후미코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2004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훈하였다. 일본인으로는 최초였다.
검색하니 몰랐던 자료가 우수수 튀어나온다.
지금 박열의 변절을 안 것은 충격이지만, 후세 다쓰지의 의로운 일을 안 것이 위안이 된다.
영화 《밀정》에 모티브를 준 김시현 독립운동가. 후세 다쓰지는 조선으로 와서 그를 변호하기도 했다.
1924년 일본 왕궁 바로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를 변호해 사형을 피하게 도왔다.
1954년 9월 13일 타계하셨다. 그의 묘비명은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라고 한다.
박열이 해방 후 출소하고 이듬해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한 것의 저의도 처음 알았다.
예전에는, 그가 독립운동을 하고 22년이나 수감하고 나와서도 우리민족을 위해 애썼다 라고 알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1945년에 광복 직후에 이미 재일본 조선인연맹 (줄여서 조련)이 결성되어 있었다.
조련은 철저하게 친일파를 배제하고 조직된 단체였다.
박열은 이미 10년전에 전향을 했으니 조선인연맹과 대척점에 서야 했던 거다.
아무튼 불편한 진실일 지라도 진실을 알아서 의미가 있었다.
이럴수록 기존에 알고 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존경이 더욱 강렬해지는 것도 같다.
가네코 후미코가 22살의 짧은 생을 마치지 않고 형을 살다가 나왔다면.
그녀는 박열의 전향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씁쓸하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독서와 서평을 마치게 된다.
(책에서)
“그럼 선배는 꼭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혁명 외에 이 사회를 뒤집을 길이 있나?”
“폭탄 투척이 혁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혁명은 아니어도 경종을 울리는 것은 될 테지. 우리가 이렇게 천황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걸 온 세상이 알 게 아닌가?”
(175쪽)
재판장은 여러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곧바로 판결을 내렸다.
“형법 제73조 및 폭발물 단속 벌칙 제3조 위반을 적용하여 피고인 가네코 후미코와 피고인 박열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법정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재판장이 일어나서 나가는 때에야 몸을 일으킨 박열이 재판장에게 한마디 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너희들이 내 육체야 죽일 수 있어도 내 머릿속 사상이야 어쩌겠는가?”
그 뒤로 가네코가 벌떡 일어나더니 몸을 돌려 방청석의 소란스러운 기자들과 동지들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만세!”
기자들이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동지들이 일어나면서 손을 쳐들었다.
“만세!”
박열도 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만세!”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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