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고 찬란했으며 더없이 따뜻했던 날들” - 『라라랜드』
멜로 영화를 이야기하는 에세이에는 꼭 들어가야 하는 작품들이 있다.
500일의 썸머, 봄날은 간다와 같은 영화이다.
사랑을 그린 영화들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
이 에세이에는 아쉽게도 저 두 작품은 없지만 다른 ‘필수관람작’이 있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건축학 개론』 『이터널 선샤인』.
카카오 스토리 라는 데가 어떤 데인지 잘 모른다. 가끔 현직 소설가들이 신작을 연재한다는 걸로만 접했다.
박형준의 영화 에세이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는 카카오 스토리에서 100만뷰를 달성했다는 ‘화제작’이다.
읽어가면서 왜 인기와 호응을 얻었는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뷰티 인사이드』. 주인공 남자 ‘우진’이 사랑하는 여인 ‘이수’앞에서 늘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노인, 어린이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성 性인 여성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스토리를 듣고는 나와는 왠지 코드가 맞지 않아 당연하게 걸렀었다.
그런데 박형준의 글로 접하니 꽤 볼만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시선으로 기승전-사랑의 관점으로 풀어가는 저자의 글에 진심이 한가득했다.
진심이 묻어나는 글은 이렇게 ‘취향’까지도 변화시킴을 느껴서 신기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남성 동성애 영화이다.
저자는 엘리오와 올리버가 1983년 이탈리아에서 여름에 만나 나눈 불꽃같은 사랑을 관찰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각별하게 사랑을 나눴다. 그러나 예정된 이별을 했고 한참이 흐른후 엘리오는 올리버가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박형준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깨달음을 끄집어낸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 이 책의 모태가 된 그 사람을 한번도 자기 이름으로 불러보지 못했음을 후회도 해본다.
헤어지고 나서도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작가의 사랑을 받았던 여인이 살짝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책 한권이 통째로 ‘한 사람’에게 바쳐진다는 건 정말 감사하고 과분한 일인 것 같다.
그러니 나의 지난날들도 언젠가 나의 눈물을 말릴 수 있는 온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42쪽)
자, 이제 불후의 영화가 나올 차례다. 바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이 작품은 한동안 내게도 오래 머물렀었다.
그러다가 작년 늦여름, 초가을 무렵에 다시 보고는 떠나는 의식을 치렀드랬다.
아니 무슨 일개 영화에 이렇게까지 냐고?
영화광들은 아실 거다.
한동안 인생 영화였던 작품을 이제 떠나보내는 심정을. ^^
아무튼 그랬는데.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서 겨우 의연해 졌는데.
이 책에서 다시 만났다.
역시 사랑을 말하는 책에서 이 작품을 빼놓을 수는 없는 거다.
조제는 츠네오보다 이른바 ‘더 사랑했던 자’였다. 그래서 이별을 하고는 쓰나미 같은 외로움을 홀로 맞아야 했다.
하지만 츠네오는 1년 여후 조제의 집 근처를 지나다가 길 한복판에서 오열을 한다. 그것도 대성통곡을.
박형준은 조제의 성숙한 자세를 말하고, 결국 츠네오도 무언가를 깨달았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선한 비유를 한다.
더 사랑받은 사람은 시험 만점자이다. 만점자는 시험문제를 다시 풀지 않는다.
반면 시험문제를 틀려본 사람만이 틀린 문제를 다시 틀리지 않기 위해 오답정리를 한다.
‘더 사랑했던 사람’은 이를테면 오답정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작가는 비유했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거라고.
그래,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네.』
(55쪽)
『라이크 크레이지 Like crazy』라는 영화는 이 책으로 처음 알았다.
주인공 청춘남녀는 첫눈에 서로 반해서 뜨겁고 예쁘게 사랑을 한다. 하지만 보편적이었던 사랑은 역시 보편적인 헤어짐으로 끝났다.
박형준은 말한다. 젊은 날의 불꽃같은 사랑은 미쳐야만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고.
바보같고, 미친 것 같았다면 그거 사랑 맞았다고.
『사랑이 우리를 미치게 한다면 기꺼이 미쳐야지, 다른 방안이 있겠는가.』
(90쪽)
영화 <1987>에서는 연희(김태리)에 초점을 맞춰서 신선한 생각을 펼친다.
그동안 여러 평, 글을 읽었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풀어낸 글은 처음 만났다.
그건 어쩌면 ‘학생 운동’이라는 주제가 묵직해서 감히 가볍게 접근할 생각을 못해서였기도 하다.
하지만 박형준은 이한열(강동원)이 바랬던 세상은, 독재와 부조리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자유로운 인생이 놓이길 바랬던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생에는 자유로운 연애와 사랑도 들어있지 않겠는가 라고 적었다.
『나는 이 또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최소한 이제는 청춘남녀가 마음껏 신나게 연애하고 마음껏 행복할 수 있는 시절은 되었다.
작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승리를 그렇게 이룩해왔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의 배경음악인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먹먹히 들으며 잠시 생각했다.
먼저 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행복하겠다고. 또 역시 때로는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분노하며, 역시 마음껏 사랑도 해보겠다고.』
(145쪽)
『이터널 션샤인』을 통해 사랑이 남긴 기억을 반추한 작가는 『라라랜드』로 글의 끝을 맺는다.
라라랜드 역시도 열풍이 불었음에도 나는 그 ‘자장’에서 아주 멀리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박형준의 길지 않은 에세이를 읽으면서 한번 보고 싶어졌다.
가볍고 쉽게가 아니라, 진지하고 애틋한 눈으로 다가가 보고 싶어졌다.
<우리가 우리였던 날들을 기억해요>는
사랑에 대한 저자의 글이 일품이었다. 생각과 느낌을 영화에 비유하고, 영화와 접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꽤 영화를 ‘안다고 자신’했던 내게 새로운 관점, 사유를 전해 주기도 했다.
첫 작품답게 풋풋하고, 열정적이고, 겸손하다.
뭔가 늘 완숙한 작가의 책들을 찾고, 깔끔히 정리된 글들이 훌륭하다고 여겼었다.
이 책, 이 작가의 글은 처음으로 책을 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 자질을 갖고 있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좋은 에세이였다.
책에서
『더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모를 거다. 내 인생의 전부였던 그 사람이 떠난 자리를 차지하는 무중력의 외로움을.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외로움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외로움은 어디서 왔는지, 왜 생긴 건지.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된다.』
(53쪽)
『한 사람의 오른손과 다른 한 사람의 왼손이 손을 잡고 함께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로 걸어가는 사랑은 어찌 보면 그 자체로 기적 같은 일이다. 각자의 손이 서로에게 머물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지고 또 느끼며 살아왔을까.
서로의 손이 서로의 손에 머물며 그렇게 손과 손을 잡는 일은 서로의 삶을 감싸는 행위이기도 하다.』
(97쪽)
『세상에 좋은 헤어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은 헤어짐이 아마 존재하지 않을까.
한 사람과의 관계가 마무리되었다고 그 사람과 보냈던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거나 나쁘게 기억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라라랜드>가 해이 엔딩은 못 돼도 역시 새드 엔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77쪽)
『함께 행복한 만큼이 사랑이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 순간들은 서로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사랑의 기억 또한 각자의 것. ‘If’ 또는 ‘If not’.
바보 같고 미친 것 같아 보여도 계절이 다시 돌아오듯이 사랑도 다시 시작될 것이다.』
(180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