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불행의 역사
마이클 파쿼의 《지독하게 인간적인 하루들》은 1년 365일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보통 이러한 형식은 좋은 말, 교훈들을 담은 책으로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은 기획의 컨셉부터 요즘말로 신박하다.
긍정적,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아니라 나빴던 일, 불행했던 일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원 제목은 【Bad Days in History】이다. 역사 속의 안 좋았던 날들.
두꺼운 역사책이라면 집어 들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뭔가 단단히 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일년 365일을 따라 부담없이 읽으면 되겠다.
순서나 목차에 구애받지 않고 아무 페이지를 펼쳐서 읽어도 무방하다.
인류 역사를 발전시킨 일 같은 관점의 책에 익숙해서인지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불행과 사건 사고의 과거사를 읽으니, 인류의 역사가 온통 그런 것들로 점철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책장을 덮을 때 쯤에는 오묘한 느낌 하나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역사는 이토록 불행, 재난, 비참들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진보를 이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던 역사 속의 뒷 이야기들을 듣는 게 꽤 재미있었다.
어떤 인물, 사건에 대해서 접할 때 그것이 역사에서 갖는 의미 위주로 파악했었다.
그러다보니 일견 사소해 보이는 것들은 놓쳤는데 이 책에서는 사소하고 소소한 일들을 깨알같이 들려준다.
알고 보면 그런 사소하고 작은 사건들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닌 일도 많았다.
역사가 거대 담론, 승자의 승리 위주로 기록되는데 이 책은 그런 이면의 역사에 주목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으론 ‘몰랐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알게 되기도 한다.
소아마비 백신을 발견한 과학자에게 제기된 의혹, 내가 좋아했던 역사 속 인물들이 끔찍한 아픔 속에 죽어간 이야기 같은 것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시력이 안 좋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바흐는 왕실 주치의 안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실명을 하고 말았고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더 불행한 일은 같은 의사에게 얼마 후 헨델도 시술을 받고 시력을 잃었단다.
저자 마이클 파쿼가 미국 작가여서인지, 미국의 대통령들의 비화를 많이 들려준다.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읽으니까 꽤 흥미로왔다.
역사 속의 불행들을 다뤄서인지 저자의 태도는 냉소적인 면이 많은데, 그건 자국의 정치에 대해서도 동일했다.
그래서 유럽이나 심지어 북한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하다가도, 원래 그러려니 하면서 읽었다.
자국의 역사에 대해서 포장하거나 숭배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일, 흑역사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태도는 인상 깊었다.
어떤 페이지를 펼쳐 읽어도 역사 속의 굴욕적인 일들을 금방 만날 수 있는 이색적인 책이다.
그러면서 중량감을 조절해서,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들도 요소요소에 있어서 편안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저자는 역사 속의 사건을 발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관점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모든 시각에 동조할 수는 없었지만, 역사가의 시선을 접할 수 있는 점은 좋았다.
예를 들면 12월 3일은 SMS 즉 문자 메시지가 처음 발명된 날이었다.
『1992년 12월 3일, 닐 팹워스 Neil Papworth 가 최초로 문자 메시지(sms)를 보낸 이래 세계의 언어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날 이후 10대들은 상대에게 실제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멈췄고, 맞춤법을 지키는 일은 구식이 되었고, 운전자가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는 중 발생한 교통사고가 음주운전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다. 눈물 남.』
( 643쪽)
날짜 별로 역사가 나오다 보니, 중세시대와 20세기, 고대 로마와 21세기 미국이 섞이면서 종횡무진으로 펼쳐진다.
조금 산만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한 작가가 집필해서인지 전체적으로는 일관성이 있게 느껴진다. 그 점도 신기한 바였다.
역사책이 꼭 연대기적으로 전개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거창한 주제, 승자의 업적, 바람직한 일을 다루지 않아도 나름대로 읽을 만 하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흥미를 돋구면서 알찬 내용을 담은 색다른 책.
<지독하게 인간적인 하루들>이다.
책의 수식어와 부제들이 재밌다.
「미리 알아 좋을 것 없지만 늦게 알면 후회스러운 거의 모든 불행의 역사」.
「오늘 하루가 아무리 엉망이었어도 역사 속 누군가는 훨씬 더 끔찍한 일을 겪었으리라.」
【책 중에서】
『인생에서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74쪽)
『모든 상상이 누군가 처음 실현하기 전에는 농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내 상상은 현실이 되고 곧 흔한 일이 된다.』
( 49쪽)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1841년 3월 4일, 워싱톤에 모인 군중은 해리슨이 다음과 같이 잔뜩 힘을 준 문장으로 취임사를 시작했을 때 그 후 이어질 고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했을 것이다. (중략)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진 취임사에서 해리슨은 상황에 맞지 않는 고대 로마를 언급하는 등 곳곳에 양념을 뿌렸다. 하지만 그만 하길 다행이었다. 해리슨이 대니얼 웹스터에게 취임사 수정을 맡긴 덕분에 그 길이가 조금 줄어든 것이다.』
( 143쪽)
『두 도둑은 두 경비병을 지하실 파이프에 묶어서 수갑으로 채운 후 보물이 가득한 박물관의 전시실 곳곳을 누비며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마네, 드가의 작품을 액자에서 떼어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중국 화병과 나폴레옹 시대 실크 깃발의 깃대 끝에 달린 장식도 쓸어갔다.
FBI가 수많은 유력한 단서들을 쫒았지만 걸작들은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167쪽)
『마돈나와 실베스터 스탤론은 특히 딱딱한 연기로 주목을 받아 각각 기록적인 횟수의 골든 래즈베리상을 수상했다. 스탤론은 로키, 람보처럼 미묘한 역할들로 서른 차례 후보자에 오르고 열 차례 수상자가 되었다.』
( 191쪽)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 즉위한 이래 총을 사용한 암살 기도를 이미 네 차례나 경험했다.
하지만 그녀를 가장 기분 나쁘게 만든 것은 1850년 6월 27일, 전혀 생각도 못한 무기를 사용한 공격이었다. 이 젊은 군주는 세 자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는데, 로버트 페이트 라는 퇴역 장교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와 끄트머리가 쇠로 된 지팡이로 여왕의 머리를 내리쳤다. 가엾은 빅토리아는 넋이 나간 채 피를 흘렸고 이마에는 호두 크기의 혹이 생겼다. 그녀는 전례 없이 분개했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여왕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후 그녀가 겪은 세 번의 공격은 모두 총기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351쪽)
『1924년 무성영화계의 스타 버스터 키튼이 코미디 영화 <셜록 2세>에서 직접 스턴트를 하다 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이후로, 사람들은 영화 촬영 현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었다.』
(398쪽)
『가장 유명한 테러. -2001년 9월 11일』
(490쪽)
『“멍청하게 넋이 나간 채로 집행 취소 소식을 들었다”고 도스토옙스키는 기억했다.
“다시 살게 되었다는 기쁨은 없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시끄럽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미 최악의 순간을 거쳐 왔던 것이다. 가련한 그리고리예프는 미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버텼을까? 모르겠다. 그때 우리는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감옥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삶을 돌려받았다는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시베리아에서 4년간 강제노역을 하고 이후에는 군대에 강제 징집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덕에 러시아 문학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리고 다른 고전들이 아직 쓰이지 않은 때였다.』
( 610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