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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

사나예 2018. 11. 30. 04:49

 

 

뭘 과시할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매일 성경을 열심히 읽는 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은 나는 이것만은 꼭 붙잡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7,8월에 살인적인 더위가 찾아왔을 때 치열하게 성경을 읽었던 것이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 성경 읽기의 슬럼프를 겪는 것 같다. ㅠ 지난 계절 열심히 읽었으니 좀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오만함인지도 모르겠다.

내 힘만으로는 어떻게 안되어서 조금 쉬고 있다. (큐티는 매일 한다)

 

내 곁에는 신앙 서적들이 많이 있다. 고전이라 칭해지는 책부터 최신 미국 작가의 책들까지.

그런데 또 완독한 책은 소수이다. 

그러면 이럴 때 한번 읽어볼까? 그래서 이 책을 오랜만에 다시 집어 들었다.

 

목사이자 문학평론가인 김기석의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

 

책이 나온 6월에 구입을 했어서 앞부분은 읽었다. 거의 6개월전이니까 다시 처음부터 해서 중반부 즈음까지 읽었다. 구체적으로는 131페이지까지 읽고 쓰는 리뷰이다.

 

책의 큰 제목들과 소제목들만 읽어도 뭔가 느낌이 있고 좋다.

1부_느려도 함께. 2부_한 방향으로, 오래도록, 단호하게.

3부_설레는 마음으로.  4부_온유하고 겸손하게.

 

1부와 2부의 소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생명과 향유, 자족과 경탄, 정의와 환대, 위로와 긍휼, 사귐과 연대, 느림과 꾸준함.

노동, 평화, 동행 등.

 

오늘날에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는 것은 경제 논리인 경우가 많다. 김기석은 이렇게 경제 논리가 생명 논리를 압도하면 세상은 죽음의 땅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경제 논리가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을 따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풍요롭지는 않아도 남과 우정을 나누며 사는 기쁨, 자연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에 감동하며 사는 삶,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설 자리가 되어 주고, 누군가의 비빌 언덕이 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은 가능합니다.」

(20쪽)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은 질서있고 자유로우며 아름답다. 사람들은 이 자연을 보존하면서 마음껏 향유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부여받았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근원은 즐거움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존재의 근원에서 비롯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분주한 일상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벗어나서 하나님의 훌륭한 작품들 앞에 서곤 해야 한다.

우리 속에 그런 여백이 마련될 때 비로소 평화를 전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는 사람들 속에 있는 욕망을 부추기는 일에 명수이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광고와 접하며 산다.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기호’라고 말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진 것이 변변하지 않은 데도 당당한 사람이 있다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다고 질타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빵의 문제가 사소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밥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밥의 문제에만 붙들려 살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아깝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수행하며 살 것인가도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삶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뜻이 부족해서 빈곤하다고 작가는 덧붙인다.

 

디모데전서 6장은 이렇게 적고 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쉬운 사람은 사실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삶을 단순하게 바꾸는 연습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 저자 김기석은 몇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어떤 것도 인간이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본다. 인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동원되거나 파괴되어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 살기 위해서 변형을 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것은 꼭 필요할 때,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둘째,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몸은 하나이고 머리가 둘인 샴쌍둥이가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논쟁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랍비는 어느 한 사람에게 아픔을 가했을 때 함께 아파한다면 한 사람이고, 아파하지 않으면 두 사람이라고 말했다.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이들은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세상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신비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헛헛함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은 헛된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홀로는 어렵다고 작가는 단언한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다.

새로운 삶에 눈을 뜬 사람들이 모여 서로 격려하고, 협동하고, 새로운 삶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은 ‘다른 삶에 대해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 35쪽)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맞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벌이셨다. 

사회적 약자들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밥을 함께 나누어 먹고, 서로의 약함을 돌보아 주고, 삶을 함께 경축하며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꿈꾸신 세상이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생태계에 부담을 덜 주며 살게 된다.

 

호세아는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고, 땅과 곡식이 응답하는 세상을 예언했다. (호세아 2장)

김기석 작가는 이러한 세상이 바로 평화의 세상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열어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에 눈을 뜨십시오. 척박한 이 세상 현실을 명랑하게 돌파하십시오.

없는 것을 애달파하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십시오.

자족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삶의 보화입니다.」  (36쪽)

 

김기석은 가끔 인생이 미로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중심에 가까이 이르렀다 싶은 순간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에 중심을 향한 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런데 작가는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중심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임을.

 

예수를 믿는다는 건 주님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그분의 삶과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일종의 허위의식일 뿐이다.

신앙이 허위의식이 될 때 그에게서는 악취가 나게 된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했다. 꽃이 피면 향기는 절로 펴져 나간다. 누군가의 내면에 그리스도라는 꽃이 피었다면 숨긴다고 해도 향기는 퍼질 것이라고 작가는 비유한다.

 

혹시 신앙생활이 기계적인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가. 

저어 주지 않으면 더껑이가 앉는 팥죽처럼, 우리 마음도 적절한 자극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하지 않으면 익숙한 길, 편한 길, 넓은 길만 선택하게 될 것이다.

 

자기 힘에 대해 과신한다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우리 삶에 가끔 실패나 곤경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한낱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약 전도서의 기자는 인간의 자부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기록했다.

『나는 세상에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긱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전 9:11)

 

잠언에 나오는 말은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이루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란 구절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버리고 바알 신을 섬기고 자신들의 능력을 맹신한 결과를 경고했다. 그것은 참혹한 멸망이었다.

이런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호세아는 답까지 전달해주는데 단순하고도 명료한 방법이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 (호세아서 10장 12절)

 

핵심은 정의이다. 김기석은 정의가 어려운 이들과 좋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과 관련된 것이라고 했다. 이웃들을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로 보는 것이 정의의 시작이다.

정의의 열매가 사랑인 것은 그 때문이다.

 

호세아서의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는 제언은 결코 쉽지않은 명령이다. 하지만 꼭 실행해야 하는 명령이다.

우리 존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p.45)

 

「그래서 믿음을 결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르고 끊는 것이 바로 결단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사과 한 알에서 과수원을 보는 게 믿음이라고 말했다.

정의와 환대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자라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심는 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해도 그 씨앗이 싹 트고 자라서 열매로 맺힐 날이 올 것이다.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추는 세상.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는 세상’. (시 85)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님을 알자. 자기 마음 밭을 갈아 엎으며, 정의의 씨를 뿌리는 이들을 통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자.

예배란 종교의 장소에서 일정한 형식으로 드리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가꾸는, 앞에서 말한 땀 흘림의 현장이야 말로 진정한 예배의 자리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다.

우리 시대에는 오감 가운데서 시각이 강력한 영향을 갖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찰이란 자기를 살피고 보살피는 것인데 이는 사람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성찰은 물론 고독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늘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접속 중인 이들은 성찰적 존재가 되기 어렵다고 작가는 말한다.

 

자기 속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 부끄러움 등을 살필 용기가 없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 가혹한 법이다.

그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허물을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이다.

 

하나님께 늘 기도를 바치며 사는 이들조차 성찰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은 작가에게 늘 아픔이라고 고백한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거울 삼아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50쪽)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상처와 나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보다는 그것을 사랑으로 부둥켜안으셨다. 때로는 몰아치는 강풍으로, 때로는 따스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참 삶의 길로 이끄셨다. 또한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불러 주셨다.

 

전도서 기자가 말하듯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면 허물 때가 있고, 나아갈 때가 있으면 물러서야 할 때도 있다.

때를 아는 것을 분별력이라고 할 수 있다.

 

때를 알고 살면 무의미한 순간이란 없다. 쓰라림이야 없을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는다. 어둠이 지극하면 빛이 다가옴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의 온갖 것들에 접속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 접속하기 위해 애쓰자.

「우리 삶이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을 때 우리는 깊은 자유와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집착은 내가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로잡힌 상태이다.

욕망과 집착의 뿌리는 결핍감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결핍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그것을 채우기 위해 이웃의 삶에 무관심해진다.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고독이 찾아온다. 고독하기 때문에 더욱 소유와 욕망에 집착하게 된다. 악순환인 것이다.

 

신앙은 결단이라고 작가는 거듭 강조한다. 결단은 버릴 것은 버리고 붙들 것을 확고하게 붙드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에게 어느 기자가 지금도 열심히 연습하시느냐고 물었다. 피아니스트는 그렇다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연주자라면 당연히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매일 꾸준히 5~6시간 연습한다.

그 이유는 수준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음악이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김기석은 묻는다. 여러분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이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눈은 어둡지 않은가?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지 않아도 괜찮은 것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을 버렸는가?

버릴 것을 버려야 꼭 붙들어야 하는 것을 붙들 수 있는 것임을 작가는 일깨운다.

 

우리는 살면서 위로가 필요한 일을 종종 경험한다. 또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고 실수하기에 긍휼이 필요한 존재이다.

오늘 이 순간 짙은 어둠 속에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으시기를 작가는 권고한다.

위로를 받았다면 곁에서 아파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하늘의 위로를 전할 것을 말한다.

 

진정한 위로는, 새롭고 희망찬 상황으로의 전환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이름들을 손바닥에 새기시고, 우리를 위해 신실하게 일하신다.

 

부디 슬픔과 애통, 고통과 상처, 소외의 어둠 속에 있는 모든 분들이,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고 새 희망을 회복하기를 소망한다. 주님이 개입하시는 긍휼의 역사하심 가운데 마침내 광명의 땅에 당도할 수 있기를 작가는 소망한다.

그리고 그 위로의 말과 긍휼의 행동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움이야말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김기석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리움, 저마다의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낙심할 수 없다.

 

참 사람이 되기 위한 지식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깊은 사색과 성찰 그리고 기도, 사랑의 실천과 불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은 이러한 참 사람이 되는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신뢰하면서 기다려 주어야 한다. (84쪽)

자기 속도에 맞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고흐의 결의 혹은 다짐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척박한 땅을 일구고 거기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발걸음이 힘차다. 절망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마음이면 됩니다. 속도에 너무 집착할 것 없습니다.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총을 맛보며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나아가면 됩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 (빌 2:13) 께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자라지만 결국 벽을 넘는 담쟁이 넝쿨처럼 하나님의 선한 나라는 그렇게 조금씩 자랄 것이다.

 

우리는 손과 발로 정직하게 땀 흘리는 노동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손길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고, 북돋고, 따스하게 보듬어 안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움켜쥐는 일에만 익숙해진 것은 아닌가. 거절하고 밀어내는 일에만 사용되고 있지는 않는지 때로 점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고여서 정체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항상 새로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사고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개방하고 낯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작가는 권면한다.

 

평화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미워하는 이들 사이에 살면서도 평화를 단호히 선택하는 이들의 용기를 통해서 평화는 온다.

 

《동행》 단락에서 작가는 지금 당신의 동행은 누구인지를 묻는다. 또 누구와 동행할 것인지를 묻는다.

 

실의에 잠겨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사람은 길 위에서 낯선 나그네와 동행하게 되었다. 그 짧은 동행이 그들의 삶을 뒤바꾸어 놓았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 관리인이었던 내시는, 광야에서 빌립과 동행하였다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삶이 제아무리 힘겨워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복음) 하신 분이 우리의 동행이시니까.

 

지금 나와 함께 길을 가는 그의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에 산들바람이 부는 것처럼 행보가 가뿐하다면, 나는 그의 좋은 동행이다.

 

누군가의 동행이 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희망을 창조하는 일이다.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의 동행이 되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는 어차피 호모 노마드로 이 세상을 걷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어 바울의 마음이 든든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삶에 든든한 동행이 되기를 기원한다. (p.122)

 

대개 사명이나 소명으로 거론되는 개인적인 부르심이 있다. 김기석은 이 책에서 ‘순명 順命’

으로 명명하면서 살펴보았다.

가톨릭의 수도자들은 순명서원, 청빈서원, 정결서원 등 세가지 서원을 한다. 여기서 순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였다.

 

순명이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을 분별하여 따르는 것이 순명이다.

 

순명은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들 상호간의 윤리이기도 하다고 김기석은 말한다.

 

순명의 반대말은 불평이다. 불평은 존경심과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의 상태다.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까닭은, 

나만의 소리를 내지 않고 다른 이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조화로운 화음을 이루는 법을 배우라는 초대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지 않고는 더불어 살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순명은 매일매일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미움과 냉담함을 극복해 가는 수행이기도 한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쓴 ‘수도규칙’에서 22장은 ‘수도승들은 어떻게 잠자야 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 속에 나오는 내용 중에 ‘등불은 아침까지 침실에 밝혀 둘 것이며, 옷은 입은 채로 자야 합니다. 띠나 끈도 맨 채로 자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수도사들은 항상 준비된 상태로 있다가, 신호가 나면 지체 없이 일어나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는 이러한 태도가 순명을 위한 준비라고 한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바 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누가복음 12:35)

 

저자는 이러한 순명의 마음을 자신도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고 하면서 이제는 날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살겠다고 고백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쓰게 느껴지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형제를, 자매를 진심으로 존중하십시오. 그러면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평 없이 서로 사랑하는 그 자리에 인생의 가장 귀한 보화를 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됩니다.」

( 131쪽)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서 자유와 사랑의 보화를 찾아내 마음껏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후반부 소제목들 에서.)

감사

순례

기다림

첫사랑

어울림

청년 정신

진실한 말

거룩한 삶

분별하는 사랑

흔들리지 않는 중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