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스크랩] 딜쿠샤, 희망의 궁전으로 다시 태어나다

사나예 2016. 4. 1. 01:00


딜쿠샤 현재 모습 ⓒ 송경민



사직터널을 지나는 한양도성을 따라 걷다보면 우두커니 서있는 은행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권율장군이 심었다고 알려진 이 은행나무는 400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는 행촌동의 터줏대감입니다. 은행나무를 보다보면 자연스레 한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요.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서양식 주택, 바로 딜쿠샤입니다



딜쿠샤 옛 모습 ⓒ 메리 테일러, 호박목걸이



조선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미국인 엘버트 테일러 부부는 어느 봄날 성곽순례를 하다가 인왕산 성벽아래 우두커니 서있는 은행나무와 전경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1923, 은행나무 옆 언덕배기에 붉은 벽돌로 2층짜리의 양옥을 짓고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테일러 부부에게 이 집은 행복 그 자체였을 테죠. 그래서 희망의 궁전이란 뜻을 가진 딜쿠샤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지금은 빼곡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지만 과거 이들이 살았던 시대를 상상해본다면 동화 속에서나 볼 법한 서양귀족의 대저택이었을 것입니다.



테일러 부부 ⓒ 메리 테일러, 호박목걸이



그런데 잠깐, 왜 엘버트 테일러 부부는 조선에 왔을까요? 테일러의 아버지는 당시 운산금강을 운영하던 금광기술자였고 테일러는 아버지를 따라 1917년에 낯선 땅 조선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엘버트 테일러 부부가 지은 이 딜쿠샤는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는 3.1운동을 세계에 타전한 유일한 서양 언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테일러의 일생 ⓒ 송경민



1919228, 엘버트 테일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날 때 병원 간호사가 부르스의 침대 밑에 숨긴 3.1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이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생 편으로 도쿄로 보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도쿄 주재 AP 통신사망을 통해 세계에 타전되었고 이를 계기로 엘버트 테일러는 AP 통신의 임시특파원으로 임명되었죠. 특파원 자격으로 그는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독립운동을 이끈 47인의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재판 과정을 직접 취재하였으며 당시 조선에 거주하며 이러한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취재한 유일한 서양 언론인이었습니다. 이렇듯 딜쿠샤는 테일러의 생활상이 스며있는 장소적 가치와 역사를 지닌 중요한 건물입니다. 이후 테일러는 일제의 외국인 추방령에 저항하다 결국 1942, 미국으로 건너갔고 1948년에 심장마비로 숨졌습니다. 죽기 전 테일러의 유언에 따라 그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딜쿠샤 정면 ⓒ 송경민



테일러 생의 20년이 담겨있는 딜쿠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일뿐만 아니라 건축적인 특성도 지닙니다. 이 시기 붉은 벽돌 주택으로는 찾아보기 드문 장방형 평면의 2층 주택 및 1,2층의 베란다 구성, 프랑스식 벽돌쌓기를 하면서도 벽돌을 세워 쌓는 구성, 창호 및 출입구의 테라죠타일 사용 등 건축적으로 평면 및 의장 등의 측면에서 독특하게 구성되었으며 영국과 미국의 주택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일제 강점기 근대건축의 발달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습니다.



딜쿠샤 기초 ⓒ 송경민



테일러가 돌아 간 뒤, 딜쿠샤는 오랫동안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정되어왔었고 2001년부터 국가 등록문화재 등록 및 언론박물관 조성이 추진되어 왔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건물 기초에 새겨진 ‘DILKUSHA 1923'의 진위를 밝히지 못해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2006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딜쿠샤에 대한 사실을 밝히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무단점유 문제 해결이 어려워 문화재 등록은 어렵게 되었죠.



딜쿠샤 내부 모습 ⓒ 송경민



이미 1963년 국유화 이후 딜쿠샤는 저소득층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이들에 의해 개조와 증축이 이루어졌으며 상당 부분은 훼손된 상태입니다. 겉모습은 여느 다세대주택과 다를 바 없고 국가소유로 되어 있지만 점유자들이 이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물의 관리, 보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가구가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도시가스관과 펜으로 호수를 문에 기재한 점을 볼 수 있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창문이 나무판자와 시멘트로 빛이 차단되고 있는 모습은 희망의 궁전인 딜쿠샤와는 정반대로 음산한 분위기까지 자아냅니다. 엘버트 테일러의 업적을 생각하면 지금의 딜쿠샤의 모습이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되는데 말이죠.



딜쿠샤 위치 ⓒ 송경민, 네이버 지도 재작성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대부분이 딜쿠샤를 모르고 계셨을 것입니다. 주변의 독립문, 사직공원은 누구나 한 번쯤 가봤을 장소이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딜쿠샤는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설명 드렸듯이 딜쿠샤는 역사적, 건축적인 가치를 지녔으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렇다보니 관리가 소홀해지고 본 모습을 잃어가게 되었죠. 저 또한 재작년, 도시설계 강의를 들으며 딜쿠샤를 처음 알게 되었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딜쿠샤 협약식 ⓒ 뉴시스통신사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이 지속되던 도중,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지난 226, 서울시에서 딜쿠샤를 원형 복원해 3.1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 시민에게 전면 개방한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날 문화재청은 서울시, 기획재정부, 종로구와 함께 딜쿠샤의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합의서를 마련해 업무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합의서는 1)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등 관련 법령 및 제도에 기반을 둔 무단점유 상태 조기 해소, 2) 딜쿠샤 국가 등록문화재 등록으로 영구 보존, 3) 2019년 원형복원 완료 뒤 전면개방 추진, 4) 딜쿠샤 주변 행촌권역 지역의 문화적·경제적 재생 추진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딜쿠샤를 방문한 제니터 테일러 ⓒ 뉴시스



또한 엘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는 지난 228일 서울을 찾아 테일러 부부가 조선에서 사용 또는 수집한 의복과 골동품, 딜쿠샤 관련 문서와 사진 등 테일러 일가 유품 총 349점을 기증하였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일은 딜쿠샤와 함께 앞으로도 간직될 것이고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며 "내게는 선물이며 역사·문화 유적지로 지정된 것도 의미가 크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또한 그녀는 지난해 딜쿠샤 프로덕션을 설립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딜쿠샤를 대해왔던 우리의 태도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죠.



희망의 궁전을 넘어서 ⓒ 송경민



7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딜쿠샤, 문화재청과 서울시 등 관련 기관의 노력을 통해 희망의 궁전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진정으로 우리에게 딜쿠샤의 의미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엘버트 테일러 후손들의 노력만큼 우리 시민들도 앞장서서 딜쿠샤의 가치를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재청 또한 딜쿠샤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근대기의 건축 유산을 발굴 보존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국민에게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힘써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여러분도 약속하실꺼죠? 여러분 주변에 있는 무언가가 숨겨진 문화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길 바라면서 기사를 마치겠습니다.

 


<참고>

문화재청(2016), “딜쿠샤 보존을 위해 관계기관 협약 체결”,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2016.3.18.)

임태훈(2016), “딜쿠샤 보존을 위한 업무 협약식”, 뉴시스, 226일자.

임재희(2016), “제니퍼 테일러 딜쿠샤 복원 내겐 큰 선물”“, 뉴시스, 228일자.

김용만·전호정(2016), “3·1운동 역사유산 딜쿠샤’ 70년 만에 복원해 개방”, 신아일보, 226일자.



<제8기 문화재청 대학생기자단 송경민 기자 (km643@hanmail.net)>



출처 : 문화재청 공식 블로그
글쓴이 : 문화재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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