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되기〉
얼마전에 이런 글을 썼었다.
‘글-씨네21을 정리하며.’
나의 20대의 씨네필을 회상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야심적(?)으로 토로했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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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씨네 21을 정리 하면서 -| 영화 2025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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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영화 서적이 읽고 싶어졌다.
<봉준호 되기>라는 책이 있는 걸 알고 읽기 시작했다.
봉준호의 어린 시절, 지난 영화들의 비하인드
이런 것은 나는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다.
허어. 아니 근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게 있었네 ㅎㅎ
예컨대, 대구에서 초등학생 때 서울로 이사온 국민학생 봉준호.
그는 어머니의 ‘극장 금지령’ 때문에 극장은 거의 못 갔고,
토요명화,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으로 영화에 입문했다.
MBC, KBS1, KBS2의 주말 영화 프로그램.
그 프로가 시작할 때 나오는 시그널 뮤직에 대한
봉준호의 애착에 대한 부분에서 나도 대 공감했다.
책을 읽는 카페에서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해서 나중에는 괜히 뻘쭘해졌다.ㅎㅎ
‘으아’. ‘하아..’ ‘우와.’
이런 감탄사를 내내 지르며 읽은 책이다.
열넷에서 열일곱 살 사이에 접했던 책과 앨범, 영화가 미친 충격을
커서 온전히 느끼는 것이 가능할가요? (마크 피셔)
저자는 남다은, 정한석씨.
와 이분들의 정성스런 글은, 영화 서적을 읽는 기쁨을 오랜만에 일깨웠다.
알프레드 히치콕,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종 인터뷰, 책에서 한 어록을 옮기는 대목은
진짜 나에게 희열을 주었다.
근래에 고전영화들, 하야오의 90년대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너무도 좋았는데 조금은 고독했었다.
그런데 각 감독님들의 생각을 담은 어록을 읽으면서 정말 반가웠다.
이런건 적어놓는 게 국룰이지.
히치콕의 말.
“결코 ‘전에 써먹었던 것을 이번에 다시 이용해 먹자’고 생각할 정도로 타락했던 적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원 숏의 힘》
“필름의 중간부터 보기 시작해도 힘이 있는 영화는 순식간에 무언가가 전해진다.
몇 몇 영상이 연속되는 것만으로 만드는 사람의 사상, 재능, 각오, 품격이 모두
전달된다.
힘이 있는 영화의 연속하는 숏들 가운데는 그 작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숏이 몇몇 포함되어 있다.
그 영상은 반드시 클라이맥스에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마지막 장이 이어지는 시퀀스에 살며시 들어있기도 하다.“
허우 샤오시엔
“실제 삶을 카메라 앞에서 흘러가게 내버려둬야 한다.
카메라가 삶에 대한 감성을 재생산 하도록.”
봉준호의 씨네필을 완성시킨 것은 10대, 20대 초반의 영화 경험이었다.
그에 대하여 작가들이 해석하는 이 대목은 기가 막혔다.
“10대의 봉준호는 소설과 시를 읽고 사색과 고뇌에 빠진 사춘기 소년 혹은
이전 세대가 낭만화했던 문학청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내성적이고 호기심 많은 아이는 갖가지 대중문화의 탐식가였고,
TV가 들려주는 세상의 온갖 사연들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요컨대 봉준호는 책을 많이 읽으면서 창조성을 기른 쪽이 아니라,
TV에서 해주는 영화, 갖가지 대중문화를 탐닉하면서 천재성을 기른 부류였다는 것.
“의사 선생님이 ‘명백한 불안 증세와 강박 증세다, 어떻게 사회생활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길래
나는 문제없이 잘 했다고 했어요.” (194쪽)
봉준호가 유명한 영화광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작업 하는 것, 꼭 필요한 홍보활동하는 것
이 외의 시간은 거의 전부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자신의 집에 있는 DVD 등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인 것이다.
봉준호 영화를 보면서 놀란 게,
그가 어두운 극장에서, 또 은밀한 자신의 공간에서 영화를 본 것만으로
그런 창의적인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었다.
헌데, 그의 레이다는 언제나 민감하게 세상으로 향해 있고,
그렇기에 결코 비현실적인 세계관에 빠져 있지도 않다.
대학생 때 자기만의 방식으로 운동권에 속했기도 했고,
굳이 분류하자면 좌파에 속하는 예술가 이기도 하다.
사실 이번 신작 <미키17>은 나에게는 많이 아쉬운 작품이었다.
코로나 등으로 2년 이상 개봉이 미뤄진 탓이 크지만,
SF 여도 봉준호만의 개성이 있기를 바랬는데 좀 미달이라고 느꼈다.
허나, 그것은 봉준호빠로서 ㅎㅎ 그에게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 거지
객관적으로 웰메이드인 건 부정하기 힘들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골수팬으로서 다 안다고 생각한, 봉준호의 젊은 시절의 일화들,
봉준호의 정신 세계를 더 많이 알아서 너무도 좋았다.
남다은, 정한석 작가들의 정말로 정성스런 정보력과,
뛰어난 문장력이 있어서 더욱 가독성이 높았다.
간편하게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를 보고 그 소감을 무성의하게 남기는 글이
왜 예전 커뮤니티의 글들보다 힘이 없는지, 그것을 알게도 되었다.
영화평론가 이우빈의 말처럼
영화가 힘을 갖으려면 ‘시대의식의 형상화’와 ‘공동체 정신의 장르화’가
굳건해야 함을.
이우빈은 한국영화에 대한 제언으로 이걸 말했지만
모든 영화, 영화 글에도 이게 필요함을
<봉준호 되기>를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되새겼다.
아니, 그리고 에밀 쿠스트리차에 대한 봉감독님의 소회는
너무도 나랑 똑같아서 감격.ㅠㅠ 나만 그런게 아니구나.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를 어느 시기에 되게 좋아했었는데, 이상하게 잊혔어요.”
필름 스피릿 for Narnia
“창작자의 가장 원초적이고 일관된 교과서는 자기 자신이다.
같은 교과서로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해도 학생들은 서로 다른 각자의 정신과 감수성을 키워나간다.“ 183쪽
90년대 초중반에 대만 영화에 많이들 꽂혔어요.
어릴 때 장르 영화 보면서 흥분하는 거랑은 좀 결이 다르게,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런 걸 봐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 거지만
그래도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정서적 으로도요.“ (223쪽)
“앞으로는 좀 이러지 않으려고요. 나 이런 것만 찍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정말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영화도 좀 찍고 싶어요.
너무 괴로운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허우 샤오시엔 ‘비정성시’에 대하여.
허세 없이 연출과 이야기를 품고 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양조위의 슬픈 눈망울이 클로즈업 없이 롱숏으로만 잡히는데도 빨려들었다.
이 영화에는 아시아 현대사에 대한 감동 같은 게 있다.
우리와 역사적 배경이나 분위기가 비슷해서인지 한국에서도 저런 영화가 나오면 좋을 텐데.
누가 좀 안 만둘어주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281쪽)
하마구치 류스케의 헌사.
“봉준호 영화는 간단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세계의 어떤 애매함을 그리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을 마주하기 위해서 일단은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애매함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계의 복잡함을 대면하는 인물들이 거기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봄으로써,
우리 관객들도 세계 자체를 대면하게 됩니다.
봉준호 감독은 ‘명료한 애매성’을 멋지게 구현해 내는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기생충’을 보고난 후, 저는 알프레드 히치콕을 잇는 유일한 존재가 봉준호 감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앞으로도 명료한 애매성의 작품을 계속 만들어갈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정말 재미있는 영화란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감독님 영화에는 어긋남과 헛소동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이 있습니다.
- 시나리오 써놓고 보면 저도 많이 느끼는데 인물들이 서로 대부분 다 오해를 해요. 진정한 교감이나 소통에 이르는 경우가 단 한번도 없어요. <기생충>의 클라이맥스도 오해의 극에 달해 있죠.
부잣집 잔디밭에서 벌어진 마지막 유혈극에 대해서 누구도 이해를 못하잖아. 그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못 보던 사람이 와서 칼부림하고, 송강호는 또 지하로 들어가서 숨고.
오로지 관객만이 이해하는 거잖아요. 왜 그런지 모르는데, 항상 시나리오 쓰면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내 영화 속 인물들이 교감할 때 서로 백 퍼센트 이해한 경우가 있었나? (23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