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존재
인문서 읽는 쾌감을 되찾다
저자 김곡은 현재를 ‘과잉의 시대’라고 진단한다.
무엇이든 과해야 인정받고, 나아가 스스로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게 되버린 시대.
몰입도 과해야 직성이 풀리고, 흥분도 과해야 하며
싫어함은 극혐해야 하고, 자랑은 플렉스 해야 하는 ‘우리’들.
기어이 ‘과잉존재’가 출현했다는 ‘선언’으로 저자는 글을 시작한다.
‘과잉’은 ‘경계’ boundary를 지우는 데까지 이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생각, 행동, 가치관에서 무엇이든지 ‘경계’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경계는 없을수록 좋은 거라는 ‘이념’이 칭송받는 시대다.
이렇게 말한다고 저자가 ‘꼰대’인 건 전혀 아니었다.
적절한 경계가 있음으로써 자아는 정체성을 형성해가는데
현대는 그것이 희미해졌고, 도리어 옳다고 주장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으로인해 사람들은 수많은 정체성 장애에 시달리고
우울증, 공황장애, 신경성 질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김곡은 말한다.
유튜브, SNS, 메신저에 수많은 좋아요가 오간다. 추천을 받고, 추천을 하는 것이,
모두 ‘공감’ 행위를 하는 걸로 ‘착각’에 빠지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허나 이는 ‘얄팍한’ 공감에 그치기 쉽고 어느 시점에는 허무함만을 자아낸다고 김곡은 꼬집고 있다.
현대의 사상의 공허함과 인간관계의 간편함, 개인이 겪는 질환에 가까운 증상들이
모두 ‘과잉’에서 기인하다고 저자는 여러 이론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20세기 초 멜라니 클라인으로 시작하여
20세기의 사상가 조르주 아감벤, 지그문트 바우만 등 여러 석학들을 인용하면서
주장을 펼쳐간다.
뻔한 자기계발서적에서, 일부 ‘교양서’에서 한계를 없애라고 가르친다.
‘능력주의’는 미사여구로 포장되지만 적자생존 약육강식 논리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김곡은 지적한다.
하지만 ‘한계’가 없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고,
한계를 없애라는 건 오히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해 왔다고 저자는 설파한다.
무언가 ‘과’한 현상이 만연하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뼈 때리게 안 기분이었다.
그저 과유불급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
과잉존재가 되는 것이 사회와 개인 양면에서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저자는 학구적인 접근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며 해박하게 펼쳤다.
간편한 공감 기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오히려 진정한 공감은 실종되어 가고 있다는 저자.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진지한 경청을 통한 공감이라고 한다.
경청을 가능하게 하는 건 상대에 대한 ?반대편에 대해서도- 존중감이다.
김곡은 후반부에서 권력, 국가주의, 정치를 분석한다.
언젠가부터 ‘극단’인 정치만 난무하게 된 한국의 현 정치를 이야기하는 이 부분이 무척 신선했다.
음모론이 판치고, 각종 위기론이 넘쳐서 무엇이 진짜 위기인지 분별할 수도 없어졌다.
김곡은 분명하게 강조한다.
혼란스럽다고 지겹다고 공포· 불안· 단념에 빠지면 정치 외면으로 귀결한다고.
자신은 ‘쿨하게’ 외면한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누군가들은
‘국민’과 시민의 공포와 불안을 지금도 이용하고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그건 특정 정치세력일 테고, 구조적으론 자본주의 이기도 하다.
책을 읽은 직후에 영화 한편을 보았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한 대사가 책장을 덮으며 맴돌았다.
“계속 그렇게 정의를 위한 일해 눈 감는다면, 저들은 언제까지고 우리를 개 돼지로 볼 거다.”
그 영환 1953년을 배경으로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고 경찰,군인이 되어 벌인 사건에 대한 거였다.
수십년이 지났어도 지금도 유효하지 않은가 소름돋게 생각했다.
정리하면
과잉은 규모, 수량의 이야기가 아니라 경계가 철폐된 것이다, 라는 것.
대상들간의 경계를 철폐해 무엇이 진짜 목적인지 알지 못하도록 판단을 마비시키는 것.
그에 따라 사회의 지향점은 오락가락하고, 시장의 변덕은 일상화된다.
넘쳐나는 대상들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유혹하며 주체를 팽창시킨다.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전능감을 주는 이들 뒤에는 다 계획이 따로 있다.
오늘날 퇴색한 미덕인 ‘희생’ ‘연대’.
이 단어들이 사라진 이유는 ‘공감 능력’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가짜 공감기술로 공감을 주고 받았다고 착각하게 하는 요즘의 모바일 환경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했다.
무한충전이 ‘재충전’이 아니고, 네트워크가 신뢰는 아니라는 저자의 일갈이
오래 음미하게 될 듯 하다.
독창적인 저자의 생각을 담은 선명한 문장들이 매력적이었다.
인문서 읽는 즐거움을 오랜만에 회복할 수 있어 감사했다.
책 중에서
타자들이 마주쳐야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경계를 지켜야 비로소 타자들은 마주친다. 진짜 세계는 그때서야 나타난다.
오늘날 과잉의 폭풍속에서 우리는 외로울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간다.
외로워서 과잉한다기보다는 외로울 수 없어서 과잉하며, 존재의 불완전함을 통해 대상을 마주하는 법을 점점 잃어간다.
저항만이 세계를 회복한다. (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