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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삶

사나예 2019. 11. 21. 07:20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포기할 준비를 하게 됐다. 죽음은 평안과 고통의 종식을 약속하는 듯 보였고 숨 한번 쉬는 것도 고통스러울 때마다 나는 죽음의 유혹을 느꼈다. 숨을 어떻게든 깊이 쉬어보려고 노력할 때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은 더 심해졌다.

그럼 숨을 덜 쉬는, 급기야는 안 쉬는, 다 내려놓는 쪽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85쪽)

 

이런 고백을 하는 체험을 겪은 사람. 데이비드 파젠바움은 의사이자 환자인 저자의 이름이다.

그는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진로를 바꿨다.

풋볼 선수에서 의사로.

 

희귀병이 찾아오기 직전까지 저자는 전도유명하고 튼튼한 의대생이었다. 의학의 길로 바꾸긴 했지만 오랫동안 운동선수로 단련되었기에 또래 친구중에도 풍채가 좋았다.

그런 그가 25세의 10월 갑자기 심한 통증을 겪어서 입원하게 되었다.

혼수상태에 빠졌고 수십가지의 전문 검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떤 병원도, 의사도 그의 병을 진단하지 못했다. 한참후에야 파젠바움과 가족들은 ‘캐슬만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6개월에 걸쳐 두 번 사경을 헤매고 그는 극적으로 회복되었다.

캐슬만병이라는 희귀병, 난치병은 학계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병명이었다.

이후에 데이비드 파젠바움의 끈질긴 조사를 통해서 그 실상이 알려졌다.

미국에서 6천~7천 명의 환자가 보고되었고 이들의 이후 수명은 평균 7년이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이 병은 온몸을 붓게 하고,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고 호흡을 방해한다.

몇 개월 만에 파젠바움은 25kg이 빠지게 되었다. 약물 치료를 하면서 머리카락도 빠졌다.

그는 두 번을, 친구와 가족들에게 유언을 하는 일을 해야 하기도 했다.

 

 

<희망이 삶이 될 때>는 저자가 20대 중반에 희귀병을 얻어서 다섯 차례 사경을 헤매고, 이후 점차 회복되면서 질병을 연구하는 과정을 담았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캐슬만병에 대한 의학계의 무관심과 오해와 싸우는 모습을 리얼하게 들려준다.

 

임상 의학자이자 의사가 되기 위해 펜실베니아 의대에 들어간 파젠바움은, 자신의 병을 통해서 와튼 스쿨 경영대학원을 들어간다.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대해서 의사와 간호사만 중요한 게 아니라, 전략적인 연구,

비즈니스적인 마인드가 필요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희귀병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의학계의 많은 문제점들을 목도하게 된다.

미국에 병을 연구하기 위해 설립된 수많은 재단, 단체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수요’에 맞춰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루게릭병이나 캐슬만병 같은 희귀병에는 상대적으로 연구 지원비도 배정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자신의 투병기를 담담하게 기록하면서, 그와 동시에 수시로 의학계의 관행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비판한다.

자신이 직접 겪은 판단들이기 때문에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희망이란 막연한, 낙관적인 희망이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그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도 하면서 만들어가는 희망이었다.

저자가 가톨릭 신자인데 추상적인 기도의 힘 같은 걸 자주 들었지만

자신이 경험한 희망이란 맹목적인 종교적인 희망과도 결이 달랐다고 표현한다.

 

기도의 힘이란 분명 존재하고 자신도 그걸 믿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또 반드시 해야 하는 것들을 행동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 행위라고 말한다.

 

이 책은 치명적인 희귀병을 겪으며 사경을 헤맸다가 자신의 노력과 의료진의 도움으로 병을 극복한 수기이다.

 

동시에 의학자, 경영학 전공자가 바라본 의료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이 곳곳에 심어져 있다.

 

미국의 의료 상황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어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애쓴다는 점에서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이렇게 저자가 생명을 유지하고 결혼을 하고 자신만의 창업을 하고, 사랑스런 딸까지 낳은 엔딩이라 참 다행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언제든 병이 재발할 수 있음을 늘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풋볼 경기 연장전처럼 살아간다고 한다.

 

지난달에 미국에 이민을 가서 간호사로 활동하는 분의 책을 감명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이 간호학의 관점에서 의학 현장을 보여줬다면 <희망이 삶이 될 때>는 의료계 전반의 현실을 다각도로 조명하였다.

 

신기하게도 두 분의 이름이 같은 데이비드이고, 펜실베니아 주의 의대와 병원들이 배경이었다.

 

 

풋볼을 사랑하고 코미디 영화를 좋아하며 친구들, 가족들과 유쾌하게 보내는 저자의 모습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평범한 의대생이었던 한 젊은이가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를 넘기면서,

자신의 병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가 눈물겨웠다.

 

이는 1차적으로는 동일한 병을 겪는 환우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미국의 의료 체계 전반을 성찰하는 소중한 목소리 였다.

 

 

【책 중에서】

 

나는 드디어 가슴 떨리는 16개월의 문턱을 넘어섰다. 이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역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이 어떤 재난 영화의 출연자처럼 느껴졌다.

계속 지하 벙커에 피해 있다가 드디어 밝은 태양 아래로 눈을 껌뻑이며 몸을 드러낸 사람 같았다. 운석은 지구에 충돌하지 않았고 주인공은 살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게 그 병이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재난 영화들엔 항상 속편이 있으니까.

(322쪽)

 

나는 어떤 기관이나 시스템에 정답이 다 마련돼 있고 세상의 모든 가용 지식이 들어있다는 믿음을 버렸다. 구체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막연한 ‘희망’은 버렸다. 지식을 얻기 위해 더 높은 곳에 있는 지적 권위체의 마법적이고 신비한 권능에 더이상 애걸하지 않고 내 스스로 책을 읽고, 연구 결과를 검토하고 단백질을 조사했다.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

(339쪽)

 

설령 재발한다 해도 내게는 어떤 회한도 없을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싸울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희망과 삶을 추구하는 이 여정의 모든 순간을 즐길 것이다.

(3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