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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

사나예 2019. 5. 29. 00:22

 

 

 

 

 

 

 

 

 

 

몇주전에 ‘카모메 식당’을 다시 봤다. 중년의 일본인들이 자국과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우정을 나누고 치유를 하는 이야기. 명작임을 재 확인했다.

그녀들은 각자만의 스토리가 있었다. 그 스토리에는 저마다의 시련과 아픔이 있었다.

 

그런데 이십대에 삶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20대의 주인공 ‘나’가 겪는 이야기다.

우편배달부인 주인공이 자전거 부상을 당해 병원에 갔다가 청천벽력의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오래전에 앞부분을 보았는데 중반부 이후는 보지 못했다. 보다가 흥미가 없어서 끈 건지 어쩐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영화의 판타지적인 장면들만 자극적으로 기억하고 있던 작품. 그러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보게 되었다.

 

아. ‘카모메 식당’을 뛰어넘는 일본 명작을 만난 기분이다.

둘이 주인공 나이대가 다르고 장르가 다르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이나 여운에서 그랬다.

 

 

얼마전에 본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10대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였다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20대를 주인공으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홍보 문구에서 「따뜻한 힐링 판타지」라고 했는데 딱 그랬다.

세 요소 중에 두 가지가 담기기도 쉽지 않은데, 영화는 정말 세 가지가 절묘하게 다 있다.

 

‘나’는 뇌종양 말기의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날 의문의 존재를 만난다.

자신과 판박이인 그는 희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에 하나씩 무언가를 없애면, 그만큼 하루분의 생명이 연장된다는 것.

그런데 없앨 대상은 그가 정한다는 거다.

 

처음으로 전화가 없어질 거라는 예고를 받는다. 그 전에 하루의 여유는 준다.

‘나’는 전 여친 미야자키 아오이의 직장을 찾아가서 그녀를 불러낸다.

두 사람은 대학 때 ‘전화’를 계기로 만나서 사귄 사이다.

아르헨티나로 여행까지 같이 했었지만 흐지부지하게 연애가 끝났었다.

 

전화가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그녀와의 만남과 사랑, 추억도 사라지게 된다.

 

그녀와 헤어질 때 ‘나’는 말한다. 얼마있으면 죽는다고.

그녀는 놀란 후에 말해준다. ‘너와 전화 통화를 했던 추억이 즐거웠다고.’

나는 기쁘게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그녀의 직장 영화관으로 갔는데, 그녀는 나를 몰라본다.

예정대로 전화가 세상에서 없어진 탓이다.

 

이제 ‘그 존재’는 영화를 없애겠다고 말한다.

 

영화라면 나도 좋아하는 취미생활의 중심이다. 절친인 츠타야가 골수 영화광이다.

대학 때 영화잡지를 읽고 있던 츠타야와 만나서 말을 튼 이후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영화를 매개로 한 둘의 우정을 묘사하는 장면이, 이번에는 특히 좋았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뛰어넘어, 영화라는 매체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이야기가 깊숙이 와닿았다.

1996년 개봉한 쿠스트리차 감독의 언더그라운드 이야기,

고전 독일영화 메트로폴리스, 채플린의 라임 라이트,

처음 들어보는 일본의 명작까지.

 

나는, 지금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는 친구와 여전히 츤데레 스러우면서도 

끈끈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가 사라지게 된 다음날. DVD 숍은 서점으로 바뀌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츠타야는 주인공 나를 못 알아본다.

 

 

영화가 근사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교차하는 기법 덕분이었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상투적이지 않게, 흥미진진하게 교차를 시킨다.

그럼으로써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관계가 촘촘하게 그려지고, 감동이 배가된다.

 

 

주인공이 츠타야에게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리고는, ‘마지막으로 보면 좋을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할 때.

친구 츠타야가 정신없이 가게 진열대에서 DVD를 뽑는 씬이 있다.

 

단 하나의 영화를 추천해 주기 위해서, 온 매장의 영화를 다 꺼내놓는 그 장면이 정말 감명 깊었다.

그 역할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애틋해서 더 몰입이 되었다.

 

 

다음에 사라질 대상은 시계이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시계점을 운영하는 설정이어서 의미가 있었다.

영화는, 처음에 전화를 시작으로 영화, 시계로 이어지면서 주인공의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묘사해 나간다.

 

인위적인 설정인데 구성을 정교하게 하여서,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아빠는 전형적인 일본의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듯이 보였다.

시계점을 하면서 시계를 고치는 일을 하는 아버지.

 

언제나 주인공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의 작업대에서 팔 토시를 끼고 렌즈를 눈에 대고 시계를 만지는 모습이다.

엄마가 갑자기 중병을 얻어 입원했을 때, 주인공은 아버지를 원망했다.

시계 일에 신경쓰느라, 어머니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아버지가 ‘나’는 원망스러웠다.

 

투병을 하다가 결국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는 아버지와 소원해져서 자주 만나지 않는 중이었다.

시계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아버지가 좀 더 가정에 충실하고, 어머니도 아프게 돌아가지 않으실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의문의 존재’는 고양이를 사라지게 한다고 발표한다.

남은 시간에 주인공은 어머니와의 마지막 여행을 회상한다.

어머니는 고양이를 좋아하셨다.

첫 번째 고양이 ‘양상추’를 떠나보낸 이후에 다시 만난 ‘양배추’를 애지중지 하셨다.

 

어머니는 떠났지만 양배추는 지금 주인공의 곁에 있다.

 

어느 비오는 날, 양배추마저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인공은 빗 속을 한없이 달리면서 고양이를 찾는다. 그러다가 집에 와서 고양이를 찾고는 꼭 끌어안는다.

그때 우편함에서 편지를 발견했는데, 그건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보낸 편지였다.

 

편지를 통해서 ‘나’는 자신의 부족한 점, 특이한 습관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엄마의 글을 읽는다. 

이어서 자신의 장점과 미덕을 말씀하시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린다.

엄마는 ‘나’로 인해서 삶이 행복했음을 고백하시고 떠나셨다.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공은 고양이는 사라지게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의문의 존재’는 나의 또 다른 내면의 자아였다.

 

 

영화의 설정은 독특해서 판타지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갸우뚱 하였지만, 끝으로 향하면서 그 메시지를 이해하게 된다.

 

무언가가 (전화, 영화, 시계) 사라진다면- 이라는 가정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닫게 하는 일이었다.

 

 

주인공은 의문의 존재에게 바닷가에서 고백한다. 고마웠다고.

무언가가 사라진다고 들었을 때, 그것들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된 주인공.

「세상에는 내게 소중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진리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정확히는 그 물건, 대상을 공유한 사람들과의 기억, 그들과 나눈 사랑과 추억들이 소중한 거였다.

 

 

영화는 음악이 무척 좋았다. 

피아노곡으로 심플하게 이루어진 OST는 처음부터 후반부의 하이라이트까지, 잔잔하게 흐른다.

이와이 순지 영화의 피아노 스코어들처럼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영화의 전개와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끝에 영화광 친구와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것을 나눌 누군가가 있다면 삶은 살만한 것이다』라는 대사를

서로 나눌 때 울컥 눈물이 흘렀다.

이전까지 차곡차곡 쌓인 감동이 그 장면에서 팡 터졌다.

 

저 말은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대사라고 한다.

 

 

20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사토 타케루 라는 배우.

평범한 꽃미남 같은데 연기가 깊이 있어서 몰입하기에 훌륭했다.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보는 미야자키 아오이의 특유의 차분한 연기도 좋았다.

아빠, 엄마 역할의 배우들도 자연스러웠다.

 

큰 제작비가 든 스펙타클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삶을 관조 觀照하는 인물을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이 아름다웠다.

자연광을 사용한 조명, 섬세한 미장센, 롱 테이크가 차분하게 마음을 적셔 주었다.

 

 

청춘들의 순정 명랑함을 대만영화가 잘 다룬다면,

청춘에게 닥친 죽음이란 소재를 이렇게 수려하게 담는 것은 일본의 장기인 것 같다.

 

 

여전히 인생일본영화는 『러브레터』이지만

그 이후로 청춘과 삶, 죽음을 성찰하면서 따뜻하게 묘사하는 작품을 만나서 참 좋았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2016년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