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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좋은 이유

사나예 2019. 5. 17. 00:42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문과와 이과를 가장 절묘하게 합한 전공은 무엇일까.

친구들과 재미삼아 떠올렸는데 건축과라는 결론으로 모아졌었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건축은 설계도를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공학으로 이루어진다.


미술이 바탕이 되고 과학이 들어간다.


 


건축이 수준에 이르면 이는 예술의 영역이기도 하다. 도시의 생활에 밀접한 작용을 하게 되고, 건축가의 철학을 반영하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작가 김선아의 <여기가 좋은 이유>는 건축 에세이를 표방한다.


올해들어서 두 편의 건축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방송에 출연했던 유명한 교수의 책과


일본 건축을 고찰하는 책.


모두 처음 접하는 건축 에세이여서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었다.


 


그런데 <여기가 좋은 이유>는 정확히 내 취향과 바라는 지점에 부합하는 책이었다.


 


김선아는 건축일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그런 그가 글과 사진으로써 오롯한 한 권의 책을 펴냈다.


아 이 책은 정말이지 이런 책을 만나고 싶었다- 싶은 그런 책이었다.


 


편집자가 먼저 제안해서 2년여의 준비와 기간을 거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들인 책은 티가 난다.


그런데 본 리뷰어가 감탄한 건 글의 내공과 깊이였다.


 


사진, 건축을 매개로 한 글은 사진과 결부시켜야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선아의 글들은 사진, 건축과 함께 잘 어우려져서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사진을 꼭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좋은 문장들이 참 많았다.


 


좋은 작가, 훌륭한 작가를 처음으로 만나는 일은 언제나 짜릿한 기쁨을 주는 것 같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인기 작가도 그렇지만, 나만 느껴지는 감동이 있을 때는 또 남다른 기분이다.


이 책으로 이 작가는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직 미지의 작가일 때 이 책을 만나서 참 기쁘고 영광이다. ^^


 


책에는 우리나라 곳곳의 공간들, 몇 군데의 해외 장소들을 담아 20곳을 다루었다.


카페, 도서관, 호텔, 미술관 등의 공공장소들이 주를 이룬다.


 


저자의 사진들이 글과 참 닮았다.


멋부리지 않은, 그러면서도 실체를 정확히 포착한 사진들이 담백하다.


 


사진을 주로 하는 책들이 멋을 자주 부리는데, 처음 한 두 번은 혹하지만 금방 질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김선아의 건축 사진들은 앞으로 자주 보고 싶은, 질리지 않는 멋스러움이 있었다.


 


저자의 글들은 참 신기하다.


사색과 사유를 하게 하고 상상을 하게 한다.


 


그 장소를 가보지 않았어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한다.


마침내 한번쯤 방문해 보고 싶어진다.


건축에 기대어 자신을 숨기거나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들을 자유롭게 펼쳐 놓는다.


 


어떤 쟝르를 매개로 하는 글에서 이런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모든 생각을 쉽게 이해하거나, 동의할 수 없다해도 이런 태도가 좋다.


 


삶의 자세, 살아가는 철학, 예술과 역사에 대한 생각들.


건축과 사진을 바탕으로 한 글이 이렇듯 넓고 자유로운 나래를 펼치는지 미처 몰랐다.


 


 


지금과 다른 시대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소재다. 꼭 주인공이 시간 이동까지 해내지 않아도 현재와 다른 시대의 모습, 소리, 사건들을 간접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시대극을 즐겨 본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공간 자체로써 우리를 다른 시대로 데려가는 건축물은 흔치 않은데, 우리 주위의 과거 건축물들은 대개 사용되지 않는 죽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복궁이나 민속박물관 같은 공간에서 그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역시 사용되지 않는 공간에는 힘이 없다. 그런데 여기, 커피 한약방은 조금 다르다. 어둡고 으슥한 골목 안으로 들어오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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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건축물의 기능적인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그 동네에서 어떤 의미를 구현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건축과 디자인의 자체의 설명들도 건축학적이면서 어렵지 않았다.


 


남산이 보이는 캠퍼스로 대학원을 다녔었다. 요즘 학교를 오랜만에 방문하고 싶었는데 덜렁 학교만 갔다 오기가 뭣해서 미루고 있었다.


<여기가 좋은 이유>에는 남산과 타워 전망이 보이는 장소들이 나온다.


언제 그곳들도 가고 학교도 들러서 가고 싶어졌다.


 


핫 플레이스인 성수동.  여기에 좋은 카페가 많다는 건 풍문으로 알았지만, 선택의 폭이 많아서 딱 한 곳에 꽂히지 못했었다.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성수동의 카페들은 체크 리스트에 올려 놓았다.


 


김선아는 나태주의 풀꽃을 적으면서 공간도 오래 보면 달리 보인다고 말한다.


 


 오래 보는 것이 정답이다. 공간이 눈 감아도 훤히 보이도록 익숙한 사람만이 가장 훌륭하게 다시 쓸 수 있을 테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 버리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계절이 지나가면 가지치기를 하듯

공간의 요소를 더하거나 빼면서 바꾼다면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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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안도 다다오가 지은 건축물이 있다니.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서울에서 1시간 반 떨어진 도시에 있는 뮤지엄 산.


언젠가부터 예술의 전당 전시관을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었다. 주말, 공휴일, 방학 때 주로 갔어서 그런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하고, 과제를 위해 메모하는 이들이 많았다.


전투적으로 전시를 보러 간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뮤지엄 산은 그런 것과는 정반대 라고 한다. 장소 자체가 도심을 벗어나서 기도 하지만, 건축가의 설계가 비움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뮤지엄 산에 온다면,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몸으로 들러도 좋다고 작가는 표현한다.


 메모할 필요도 없고, 치열하게 눈에 담아서 저장해야 할 전시가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좋은 자연 속을 산책하면서, 가지고 온 복잡한 생각들과 감정을 내려놓는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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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의 전환을 건물로 구현한 건축물들. 공간들.


전문적인 건축가의 해설을 통해서 설명을 들으니, 미처 놓쳤던 장소의 필살기를 전해 받는 느낌이다.


 


카페와 공간들의 이름들은 가지각색이다. 저자가 선정한 공간들은 모두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언틋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설명을 들어야 알게 되고, 그렇게 공간에 대해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카페 이름이 진정성이라는 곳이 있어서 놀라웠다. 학구적인 진정성 이라는 이름을 상업적인 공간에 과감히 쓰다니.


카페 진정성은 드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곳이다.


그래, 이런 공간이 진짜 진정성 있는 곳이지. 절로 수긍한다.


 


대학로를 가다보면 익숙하게 보던 아르코 예술극장, 미술관.


김선아 작가는 과천 국립미술관을 비롯해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들도, 책에서 소개한다.


마로니에 공원을 가면서 스치듯이 보았던 아르코 예술극장. 너무 친숙해서 별반 관심이 없었던 그 건물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서울역에 건설한 서울로. 뉴욕 하이랜드를 벤치마킹해 지은 이 곳이 처음 생겼을 때 무척 호기심이 생겨서 가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에 여러 혹평을 보고는 김이 새서 마음을 접은 적이 있었다.


소문은 그런 부작용이 좀 있는 거 같다. 병원이나, 여행 등 어떤 대상을 선택하려고 검색을 해보는데, 정보의 바다에서 좀처럼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글쓰는 사람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NS에 사진 몇 장, 소감 몇 줄로 극찬’ ‘혹평으로 극단적으로 나뉘는 문화에서는 분별력을 기를 수가 없다.


 


찬찬히 책을 통해서 글을 읽어가면서, 어떤 공간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가동하면서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판단, 결정은 반드시 생각의 과정을 거쳐서 해야 하는 것.


아무튼 그래서 작가의 글을 읽고 서울로도 꼭 가봐야 겠다 싶었다.


 


보통 새 책이 나오면, 제목 외에 여러 수식어구가 표지를 차지한다.


부제 副題가 있거나, 추천평이 있기도 한다.


출판사 편집인이 선정한 좋은 문구들을 표지에 적어 넣는 게 일반적이다.


 


이 책은 정말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었다.


자주 접하지 못하는 건축 에세이라서, 전혀 다른 감각과 사유구조로 쓴 문장들이었다.


 


작가의 문장들이 나의 감각을 톡톡 건드렸다. 생소한 분야가 많았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평소의 내가 가담하지 않는 영역들을 다루는 책을 읽는 게 독서의 묘미 妙味임을,


톡톡히 깨닫는다.


 


앞으로도 종종 펼쳐들어 볼 건축 에세이


<여기가 좋은 이유> 였다.


 


추신.


책을 읽다가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는 어떤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혼자 흐믓하게 미소짓거나 킥킥 댔는데, 얼마후 뒤쪽 페이지에서 그 단어가 재치있게 나왔다.


어찌나 놀랐는지. 처음 만나는 작가와 뭔가 통한다는 느낌은, 작가에게 한층 친밀감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책에서


 


우린 어쩌면 강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 건물의 경계를 공간의 경계로 인식하여 왔을까?


하나의 필지(땅의 경계)를 구분지어서 생각하고, 건물과 건물을 나누어서 저곳은 너의 땅,


이곳은 나의 땅이라고 규정지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커피 한약방이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며 마치 누군가 내 이마에 딱밤을 아주 세게 때린 기분이었다. 커피 한약방은 아주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두 건물을 같이 사용하고 있는데, 그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두 건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주 긴밀하게, 마치 그 좁은 골목을 자신의 마당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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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많아서 머리가 무거울 때, 어떤 선택을 내려야할지 무한 고민의 굴레에 빠져버렸을 때,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내 마음속 감정의 그릇에서 넘쳐흐를 때. 그럴 때 나는 걷는다.


집중하지 않아도 길을 잃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발걸음을 하나하나 옮기는 동안, 가득했던 생각의 조각들은 어디론가 흩어져 버린다. 생각과 감정이 덜어지니 머릿속이 간결해진다.


산책 散策은 애초부터 집중해서 무언가를 해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흐트러뜨리고 비우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산책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는 어디일까? 산책을 이루는 요소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없어선 안 될 것은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서 사라지고 나타나는 풍경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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