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 tolstoy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얻어진 것만이 참된 지식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에서
저자 이희인은 50세가 되어서 톨스토이를 재발견했다고 한다.
예전부터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작가였지만 새삼 꽂혔다.
그래서 직접 러시아,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하였고 열차 안에서, 여행길에서 톨스토이를 읽었다.
이 책 <인생이 묻고, 톨스토이가 답하다>는 그 결과물이다.
아니 이게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몇 번을 이런 감탄을 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이야기하는 책이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구나, 처음으로 느꼈다.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덤덤히 풀어놓는데, 몰입하면서 읽게 되었다.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로 봤는데 책에서도 거론하기에 소환하면서 읽었다.
이희인의 글을 읽고 이번에 가장 동정과 연민을 갖게 된 인물은 안나였다. 뜻밖이었다.
세 주인공이 다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그 중에는 제일 이해가 갔다.
그래서 예기치 않게 마음이 타격을 받고 착잡했다.
브론스키. 자기가 먼저 구애하고, 안나를 유혹하고는 어떻게 그렇게 사랑이 식을 수 있단 말인가.
카레닌. 안나가 젊고 매력적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냥 불장난은 아님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냥 보내주지. 왜 또 그렇게 굳이 이혼을 안 해준 것인가.
안나의 ‘외도’가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카레닌을 만나기 전에 이토록 격정적인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불꽃같은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고, 끝내 브론스키를 선택했다.
하지만 둘의 뜨겁고 환희에 찼던 밀회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카레닌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놔주지 않았고, 브론스키는 싸늘하게 식어서 그녀를 배반했다.
설마 이런 귀결이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비참한 현실.
이런 진퇴양난 앞에서 그녀는 기차에 몸을 던져서 투신해 죽는 길을 택하고 만다.
작가의 말처럼 ‘안나 카레니나’는 줄거리 요약을 하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역대의 뛰어난 작가들이 이 작품을 소설 중에 최고로 친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캐릭터도 단순하지 않고, 다들 공감이 가는 구석이 하나씩은 있다.
꽤 오래전의 소설인데 여전히 읽히고, 칭송받는 이유는 이러한 인물 묘사의 입체성이라고 저자는 평가하였다.
이 책을 통해서, 안나 카레니나를 영화화 한 작품들이 있었고 주인공들이 누구였는지를 처음 알았다. 그 중에 비비안 리가 있었는데 처음 알아서 소름 돋았다.
그냥 상상을 해도 싱크로율이 엄청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 책도 읽고 싶고, 비비안 리 버전 영화도 감상하고 싶어졌다.
톨스토이는 특히 노년에 동화 ·우화들을 쓰는 데에 진력했다고 한다.
동시에 『인생은 무엇인가』와 같은 잠언록, 동서고금의 지혜들을 수집하며 「독본」을 펴내는데도 힘썼다.
우화, 에세이 등 90권의 탁월하고 방대한 집필을 통해서 톨스토이는 문학 이라는 분야에서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 분량도 많았지만 작품성도 높았다.
이희인은 <바보 이반>에서 톨스토이의 사상을 탐색한다.
톨스토이는 민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동화와 우화를 썼다.
<바보 이반> 역시 아주 단순한 구성이고, 인과응보 적이기까지 하다.
신이 있고 악마들이 나오고, 악마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과 이반을 ‘시험’한다.
하지만 결국 우직하게 땀 흘리는 노동을 하는 왕국을 건설한, 바보 이반이 악마의 개입도 이기고 살아남는다는 얘기.
『바보 이반』을 비롯해 톨스토이의 우화는, 어린이를 위해서 만화책들로도 많이 나와 있다고 한다. 저자 이희인은 어렸을 때 읽었던 삽화 이미지까지 기억해 낸다.
어렸을 때는 단순하게 교훈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성인이 되고 쉰살이 된 지금 읽는 <바보 이반>은 또 다른 의미임을 고백하는 작가.
원작을 읽고 저자의 해석을 읽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희인의 글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로왔다.
아울러 전체적으로 톨스토이의 원저를 읽어보고 싶게 하는 강력한 동인 動因을 만들어 주었다.
한편 이 책을 통해서, 전세계의 수많은 톨스토이 연구자들을 만나게 됨이 또한 즐거움 이었다.
<톨스토이냐 도스토옙스키냐>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여러 애호가들이 톨스토이를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톨스토이즘, 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작년에 ‘하지 무라트’를 읽고 정말 감동하고 희열을 느꼈었다.
그 이유를, 이 책을 통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어 무척 좋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속의 문장은, 다른 대가들에 비해서 ‘미문 美文’의 향연인 건 아니었다.
철저하게 스토리에 녹아들은 문장들. 내 인상은 그랬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문장가로서 테크니션은 아니다」라는 누군가의 표현에 무릎을 탁 쳤다.
내가 받은 느낌이 그랬고, 그래서 톨스토이가 좋았기에.
<인생이 묻고, 톨스토이가 답하다>. 책은 표지와 그립감이 모두 편안하고 세련되다.
부피감이 적고 가볍다.
저자의 글은, 순수한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글인데 이해가 무척 잘 되었다.
심지어 아직 『전쟁과 평화』를 읽지 못했는데, 과감하게 책을 펴냈다고까지 표현하는 데에서 진솔해서 좋았다.
작년에 청소년 소설로 도스토옙프스키를 다룬 책을 읽었었다.
촛불을 든 도스토옙스키 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톨스토이던 도스토옙스키던,
이렇게 대문호 작가들을 다룬 책을 읽는 게 참 좋음을 깨달았다.
최종 목표는 원작 읽기 이지만,
그 전에 시동을 거는 독서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최근에 읽은 다른 책들에서 접한 아나키즘, 무저항주의도 톨스토이에 담겨 있다고 해서
굉장히 두근댔다.
러시아의 바쿠닌,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여기에 포함된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무저항적 아나키스트에 해당한다는 글을 보고 이 쪽으로도 알고 싶어 졌다.
(책 에서)
무수하게 쏟아지는 많은 책들이 있는데 원전을 읽는 일은 점점 더 먼 일, 어려운 일이 되어 간다.
강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학자들이 독자를 대신해 그 고전들을 조리있게 요약해주고 핵심을 설명해 주는 마당에 직접 고전이나 책을 읽을 필요가 무어란 말인가?
그런데 그렇게 요약되고 핵심만 짚어 주는 지식들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을까?
원하는 지식을 손쉽게 만날 수 있고 세상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인데 우리가 진정 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현명하고 똑똑해졌다면, 범람하는 저 가짜 뉴스들은 다 뭐란 말인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의 시대에 저 많은 책과 지식, 교양은 다 무슨 소용인가?
때론 맛없고 아름답지 않은 지식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진실, 우리가 딛고 서야할 자리란 걸 깨닫기가 그토록 힘든 것일까.
(225쪽)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경박한 미학이라고 비판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 “여기 테크니션 톨스토이가 있다”고 말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소설에는 폭넓은 세계관이 있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있으며, 위대한 예술이란 경험을 철학적-종교적으로 다루는 것이라는 가정이 있기 때문이다.
- 조지 스타이너
( 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