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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왕

사나예 2019. 3. 7. 00:10

 

 

 

 

 

 

『지금 같은 생활이 계속되는 게 좋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AD로 돌아갈 거냐고 묻는다면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때와는 달리 좀 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고 싶었고,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찾기가 어려워 ‘인터넷 카페 난민’ 생활이 계속되는 거였다.』

(83쪽)

 

 

오자키 마사야의 첫 번째 소설 <빈곤의 여왕>을 읽었다.

 

주인공은 스물다섯의 다치바나 마이코. 방송국 도요TV 시사프로그램의 AD이다.

도요TV는 여느 공중파 방송국처럼 24시간 분주하게 돌아가는 방송국이다.

 

마이코의 직속 상사인 나리타는 신참인 마이코를 혹독하게 다룬다. 특별하게 악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질게 훈련받아서 지금 위치에 왔기에 그럴 뿐이다.

 

한편으로 마이코의 직장생활은 고달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늘 생방송에 맞춰서 VTR을 제작하느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가끔은 초주검이 되어 집으로 간다.

 

집은 운이 좋아서 좋은 동거인을 만나서 월세 싼 원룸에서 지내고 있다.

방송일은 대게 밤에 끝나기에 들어가서는 잠만 자기 때문에, 동거인과 인간적인 교류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소설은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주인공에게 첫 번째 시련을 안겨준다. 같이 사는 사토미가 갑자기 나가달라고 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남친이 들어와서 살기로 했다는 것이지만, 서로 대화가 없는 마이코가 동거인으로 부적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여유도 없이 며칠안으로 나가달라는 부탁. 마이코는 당황하고 섭섭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수긍이 갔다.

그동안 많은 돈을 번 건 아니지만 수입은 거의 저축해 두었다. 그래서 구직활동을 몇 달 정도는 할 여유가 있음에 그나마 안도한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로 마이코는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인연을 끊다시피 했던 어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연대보증인을 마이코로 했다. 마이코는 화가 치밀지만 자신의 전재산을 대부업체에 갚고는 이걸로 그녀와 연을 끊을수 있다며 오히려 홀가분하다.

그러나 인터넷카페 난민 신세는 피할 수가 없었다. 시부야구 중심에 있는 네트마니아 라는 곳으로 정했다.

 

다른 데 몇 군데 가봤는데 지저분하거나 위험해보였다.

이곳은 그에 비해서는 그래도 안전하고 깨끗하다. 레이디 룸 여성 전용 개인실이 있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AD일을 그만두고 휴지돌리는 아르바이트 직을 구한 마이코.

언제 인터넷 카페를 탈출할지 기약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다큐멘터리 같은, 시사문제를 고발하는 진지한 작품같다.

 

그런데 마이코가 인질이 되는 사건을 겪으면서 소설은 블랙 코미디의 정체성을 뚜렷이 확립한다.

 

같은 인터넷 카페에서 몇 번 마주쳤던 중년의 남성. 그는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도피하면서 이 카페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엽총을 들고는 ‘이 곳을 점거한다’며 사람들을 위협하고, 마이코 한 명을 인질로 삼았다.

결과는 다행히 그 남자는 경찰에 붙잡히고, 마이코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런데 마이코의 일상에 큰 변화가 닥쳤다. 인질범이 생방송에 대고 “다치바나 마이코의 빈곤을 해결하라‘고 여러번 외친 덕분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마이코가 자신의 상황을 소상히 말하게 되었는데, 사내가 이것을 동정하면서 생중계에 아무말대잔치처럼 떠벌린 것이었다.

 

마이코는 그걸 원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말렸었지만 인질범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마이코는 무사히 풀려나긴 했지만 한순간에 ‘유명인’이 되었다.

 

한편 마이코가 알바를 할 때 만났던 남자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이코의 매니저를 자처하면서, 언론사나 영상제작사의 취재를 받는 일을 한다.

마이코는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따라다니다가 그와 헤어짐을 택한다.

 

제목 <빈곤의 여왕>은 마이코가 유튜브를 개설한 동영상의 제목이다.

마이코는 다시 일용직을 하며 인터넷 카페에서 지내면서, 문득 어느날 동영상을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청년 중에는 자신만큼 빈곤한 이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고, 일종의 ‘빈곤 노하우’를 서로 공유하자는 소박한 취지에서 였다.

 

언론과 세상은 인질 사건은 금새 잊었지만, 그녀가 유튜브를 하자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20여건의 동영상은 각각이 5만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게 된다.

 

<빈곤의 여왕>은 주인공 마이코가 겪는 웃픈 현실을 블랙 코미디로 풍자한다.

 

이 소설에서 진심이 느껴졌던 건, 마이코가 닥친 상황을 타개하는 모습 에서 였다.

 

인질에서 풀려나고 유명인이 된 이후에 그걸 이용해서 돈벌이에 나설수도 있었던 마이코.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유튜브 또한 남들과 다른 ‘인지도’를 써먹어서 수입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녀는 그런 길을 택하지 않는다.

 

소설은 이제 뭔가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겠다 싶은데 뚝 끝을 맺는다.

그만큼 마이코의 캐릭터에 애정이 가는 결말이었다.

작가 오자키 마사야는 ‘드라마화’를 염두에 두고 애초에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상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한편으로는 조금 더 길어도 좋았겠다 싶은 아쉬운 엔딩이었다.

 

우리나라의 청년 빈곤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는 청년 고용 상황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소설에서 묘사하는 사회상은 리얼하게 다가왔다.

 

오자키 마사야는 기본적으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출중함을 이 소설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 각본, 연출을 왕성히 하고 있는 현역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 분의 작품을 눈여겨 봐야 겠다.

 

 

『어른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결혼해 아이를 낳고, 집이나 차를 사도록 젊은이들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그러지 않는 젊은이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수입이 줄고 장래에 대한 전망이 서지 않는 지금, 그렇게 쉽게 사회 요구에 응해 돈을 낭비할 순 없다. ‘청년 ○○이탈’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건?

‘돈의 청년 이탈’인 경우가 많았다. 젊은이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건 가혹하다.』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