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마일
그린 마일.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2000년 작.
어떤 영화를 감명깊게 보고나서는 99프로 직후에 리뷰를 써서 남기는 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했거나, 아주 드문 경우이다.
꽤 오래전 영화인 <그린 마일>. 이 작품은 그런 예외적인 1% 였다.
어제 3시간에 걸쳐서 보고 끝에는 울컥함도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곰곰이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고 비로소 모니터 앞에 앉는다.
영화가 시작하면 나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노인이 어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인 액자 구성이다.
그는 폴 에지컴으로 40대인 1930년대에 콜드 마운틴 교도소의 교관이었다. 명배우 톰 행크스가 연기했다.
1930년대의 시골 교도소. 화면으로 보기에도 열악해 보였다. 더울 때 냉방도 없다.
그 곳은 사형을 앞둔 흉악 죄수들을 맡고 있었다.
꽤 고단하고 위험한 일이지만 폴은 사명감으로 일을 잘 하고 있다.
그의 동료들은, 브루터를 비롯해서 3명의 부하들이 있는데 모두들 충직하고 폴을 신뢰한다.
최근에 젊은 교도관 한 명이 들어왔는데 그는 안하무인이다. 매뉴얼을 강조하는 듯 하지만 그는 인정사정 없었다. 결정적으로 죄수들을 멸시하고 자신은 그를 교화한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몇해전에 드라마 ‘슬기로운 감방생활’을 재밌게 봤었다. 수감된 죄수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였는데 무척 낯설긴 하지만 그간 볼 수 없는 소재여서 참신했다. 비록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질러서 응당한 죗값을 치르고 있긴 하지만, 어느날은 교회당에 가서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참회하는 한 사람의 모습에는 나도 펑펑 울었다.
<그린 마일>은 톰 행크스 만큼이나 유명한 소설가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래서 참신하고 짜임새있는 이야기가 영화로써 기본적인 재미를 보장한다.
보기 시작할 때 19금이라 좀 의아했는데, 영화에 죄수들의 실상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걸 보고는 이해가 되었다. 게다가 세 차례에 걸쳐서 사형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와서 이기도 하다.
신입 교도관이 버릇없어 보이긴 해도 그렇게 나쁜지는 몰랐다. 그런데 한 사건으로 그의 인간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프랑스 출신의 죄수 ‘델’을 사형하던 날.
이 영화에는 30년대의 미국 한 주의 사형법이 세세하게 나온다. 전기의자 집행이다.
사형수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처형’을 효율화하는 방법이다. 머리에 기계를 연결해서 전류를 흐르게 해서 뇌를 파괴하여 죽게 한다. 이때 머리를 덮는 모자 안에 스펀지를 넣는데 스펀지에 반드시 물을 흥건히 적셔야 한다. 그래야 일이 신속히, 무사히 진행된다.
그런데 신입 교도관은 일부러 스펀지에 물을 적시지 않고 마른 상태로 형을 집행했다.
평소에 ‘델’을 고깝게 봤던 그. 그래서 몇 분이라도 더 고통을 주려 한 거였다. 그런데 일은 그런 장난 수준을 넘어 섰다. 스펀지의 물은 작은 역할이 아니었다. 전류는 불을 일으키고 사형수를 활활 태우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집행에는 범죄의 희생자 유가족을 비롯해 관련된 사람들이 참관을 한다. 그런데 마치 중세 시대 화형처럼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코를 진동하는 인체 타는 냄새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한다.
델이 고통 속에 죽어 간 것은 가장 잔인한 일이었다.
폴과 동료들은 일이 끝나면 늘 지하에서 망자를 보내는 조용한 의식을 치러왔다. 비록 범죄자와 간수 사이로 만났지만 생의 끝을 함께 했고, 또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다.
새카맣게 탄 사람 앞에서 폴은 망연자실한다. 동료들은 신입에게 평소 갖고 있던 불만이 터져 나온다.
교도소장 워든은 이 때 내려오고 이게 무슨 일인지 질타한다.
폴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신입을 다른 교도소로 전출시킬 계략을 짠다. 동료들도 찬성이다.
영화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이러한 일들로 채워져서 미드 두 세 편을 보는 듯 했다.
폴과 교도관들은 5명이고, 재소자들은 세 명. 그런데 신입 교도관의 모습은 단순히 얄미운 사람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모습을 보이게 된다.
폴과 동료들과 같은 심정으로 이야기를 보게 된다. 신입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응징’할 것인가. 똑같이 복수하여 대하는 건 아니다. 악하지 않고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를 쫒아낼 방법은 무엇일까.
한편 콜드 마운틴 교도소에는 ‘존 커피’도 있다. 커피는 마시는 차와 이름만 같고 철자는 다른 커피다. 그의 범죄 내역도 다른 이들처럼 끔찍하다. 쌍둥이 소녀 자매를 강간 살인했다는 것이다.
폴은 처음에는 존의 우락부락하고 거대한 외모를 보고 그럼 그렇지 했다.
하지만 매일 대하면서 차츰 의구심을 갖는다. 존은 겉모습만 험상 궂지 세상 순둥한 흑인이었던 것이다.
어둠이나 밤을 무서워하고, 자주 혼자 우는, 되려 아이같이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폴은 신비하고 기이한 일을 경험한다. 평소에 요로 감염증, 즉 방광염으로 고생하던 폴이었다. 그는 교도소 복도를 지나가다가 고통에 쓰러졌다. 그 때 자기 수감실에 있던 존 커피가 그를 불렀다. 이 쪽으로 오시라고.
옆 칸의 수감자가 가지 말라고 한다. 폴은 커피가 무서운 이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별 생각없이 다가가 본다.
그런데 갑자기 존이 그의 생식기쪽을 움켜 잡는 것이다. 폴도 놀라고 옆칸 수감자는 소리를 지르며 사람을 불렀다.
폴은 맥을 못 차리고 잡혀 있었다. 잠깐은 피할 타이밍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자신을 그냥 맡기게 되었다.
존은 역시 신기한 말을 하고는 손을 놓았다. 이제는 아프시지 않을 거라고.
자신이 아픈 걸 안 것도 신기했다. 폴은 곧장 화장실로 가서 확인을 해 보는데 평상시에는 무척 아팠던 데가 아주 편안하게 나았음을 발견한다.
폴은 너무도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었지만, 일단은 아내에게만 말하고 비밀을 간직한다.
이후에 또 한 사건을 통해서 존 커피가 특수한 능력이 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사람의 아픈 데를 치유하고, 죽은 동물을 살리는 능력 Gift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존은 기독교인이었고 폴과 간수들도 크리스챤이어서 그들은 존이 주님God에게서 특별한 은사를 받았음을 깨닫게 된다.
존 커피는 결국은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전기의자로 향하게 된다.
그린 마일을 걸어서. 그린 마일은 집행장까지 걸어가는 길을 일컫는다.
사실 커피는 무고하게 처벌을 받은 거였다. 그는 자신의 치유력으로 자매들을 돕기 위해서 현장에서 있었는데, 그것만으로, 또 그가 무력한 흑인이었기에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자세하고 반전인 이야기는 후반부에 기다리고 있다. 진범이 밝혀진다.
영화가 단조롭지 않았던 건, 액자식 구성 덕분이기도 했다. 현재로 돌아온 노인 폴.
그는 알고보니 놀라운 비밀을 안고 있기도 했다.
그의 1인칭 나레이션으로 <그린 마일>은 막을 내리는데, 이러한 엔딩이 무척 신학적이었다.
2000년 작. 오래됐다면 오래된 작품. 톰 행크스 외에는 현재 그렇게 유명한 배우들도 있지 않다.
그런데 배우들의 호흡, 케미컬이 너무도 멋있었다.
특히 이 리뷰를 꼭 남기고 싶은 계기를 준 배우와 역할이 있었다. 콜드 마운틴 교도소 교관의 막내였던 간수.
그는 극 후반부까지도 그렇게 드러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맡겨진 역할이 묵묵히 선배들과 함께 하는 거였기도 했고.
그런데 존 커피가 사형되는 날, 집행을 치르는 때에 클로즈업으로 꽤 비중있게 그 간수를 비추는 컷들이 두 어 장면 있었다. 그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사실 간수로서는 적법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전까지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면서 그는 커피의 영혼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조연 중에도 끄트머리 조연이었던 그 젊은 미국 배우의 얼굴 그리고 눈물.
그 모습이 어찌나 순결해 보이던지. 그 얼굴이 어찌나 환하고 빛나 보이던지 모르겠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1994년에 <쇼생크 탈출>을 연출해서 크게 성공을 했다.
그러다가 5년 만에 차기작으로 선택한 게 역시 킹의 소설인 이 영화였다.
<그린 마일>은 톰 행크스는 나오지만 그렇게 Major 하다고 볼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참 의미가 깊었고, 신앙 영화로도 느껴졌다.
그동안 볼 기회가 두 세 번은 있었는데, 3시간 길이의 넘사벽으로 끝까지 보지 못했던 영화. 이번에 전편 감상할 수 있어서 좋고 흡족했다.
<그린 마일>은 영적인 이야기를, 판타지에 담아서 담아낸 수작 이다.
또한, 톰 행크스는 진정으로 최고의 배우라는 걸 절실히 다시금 깨닫는다.
p.s.
포스터를 찾다가 아래 걸 찾았는데 카피문구에 또 찡.
아 스필버그도 네 번이나 우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