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올해는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일도 백년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님.
책 <우당 이회영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는 이회영을 그리는 책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서 답사를 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인 자료로 이 책을 펴냈다.
처음부터 몰랐던 사실을 알아서 놀라웠다. 이회영의 선조가 이항복이었던 것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하기 위해 애쓴 인물이다.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기도 했다.
이회영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관리가 있었고 의로운 일을 했던 명문가였다.
요즘말로 치면 이회영은 금수저 신분이었다. 이회영과 6형제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했다. 이회영은 서구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했다.
집안의 노비들을 풀어주고, 아랫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인격자였다.
이회영은 당시의 사대부 선비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이 병으로 죽은 이후 재혼을 했는데 교회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상동교회에서 식을 치뤘는데 이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행한 신식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서양식도 이색적인데 다른 한 가지에 또 의미가 있었다.
당시에 서울의 감리교의 양대 교회에는 정동교회와 상동교회가 있었다. 정동교회는 주로 양반들이 다니고 상동교회는 중인 이하의 신도가 대부분이었다. 이회영은 이에 은근히 반발하는 의미로 상동교회를 택한 것이었다.
이회영의 친동생 이시영은 조정 관리로 외부 교섭국장이었다. 헤이그 특사 중 한 분인 이상설은 이회영의 절친이었다.
이회영은 온 가족과 측근에 모두 쟁쟁한 애국지사들이 곁에 포진해 있다.
아니, 이회영 스스로부터 애국지사였기에 그런 이들이 모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진정한 동지였고 모두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된다.
이회영의 독립 운동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국노들에 의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주권이 빼앗긴 것은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결하는 것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회영의 계획은 즉흥적이거나 허술하지 않았다.
치밀하게 기획하고 체계적으로 도모하여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마침 그에게는 적지않은 자금이 있었고 이회영은 형제 여섯명과 일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06년 북간도에는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이 설립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회영은 한동안 국내에 남아서 비밀결사체 신민회를 조직했다.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거사를 기획하였다.
알려졌다시피 헤이그 특사는 실패하여 고종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하고 선열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부터도 관심이 있었던 헤이그 특사의 이야기. 언제 드라마나 영화로 자세하게 재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한 그 내용에 소름이 돋았다.
1907년 4월 22일에 이준이 선발대로 먼저 출발하여, 이상설, 이위종과 해외에서 합류했다.
이분들은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으니 두 달에 거쳐서 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한 이준, 이상설 특사는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여기서 이위종 선생을 만나고 세 분은 배를 타고 베를린으로 가서 다시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준이 자결했다는 역사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 여러 학자들은 이준이 병사했다고 기록을 고쳐야 한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런 심증을 더욱 굳혔다.
배, 열차를 갈아타면서 대륙을 횡단해 두 달에 걸쳐서 헤이그에 도착을 하셨다. 거기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끼니까지 마다했으니 병이 나서 순국하셨다 해도 나는 이게 맞다고 여겨졌다.
이회영이 교류한 지인들에도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그랬기에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에서는 많은 독립투사 이야기들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우면서 감동적이었다.
당시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 얼마나 헌신과 희생이었는지를 새록새록 배우는 시간이었다.
어떤 독립운동가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죽은 후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분들은 일제에 의해서 죽음을 맞았지만 유해를 찾지 못해서 묘소가 비어 있다.
이준이 순국한 후에 부인은 그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 등지로 전전하셨다고 한다.
이회영의 독립운동이 후손들에 의해서 알려지긴 하였지만 그가 행한 방대한 일들에 비해서는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여러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죽음을 읽으면서 계속 코끝이 찡해졌다.
이런 느낌을 받아서였다.
‘내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고 목숨이 위험한 걸 감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독립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고, 후손이 몰라도 상관이 없다.
시신이 수습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해도 괜찮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일이 평가받기를 원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조국이 독립되는 것에 한 알이 밀알이 되고, 작더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계속 읽으면서 와 진짜 이런 ‘싸나이’가 있으신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여러 자료로 이회영 선생님에 대해서 접했지만,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멋진 한 명의 인간으로 여겨졌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으면서 망명길에 오를 때 이회영이 형제들을 설득해서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때 이회영은 ‘언젠가는 반드시 조선이 독립할 것이고, 그때까지 왜적에 맞서 싸우는 것은 백사 공의 후손된 도리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백사는 이항복의 호이다.
후손된 도리. 이 표현이 왜 그렇게 마음을 치던지.
나는, 지금 우리는 이회영을 비롯한 숭고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이회영은 동지들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개교한다. 민족 교육과 군사훈련의 두 가지에 박차를 가한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에 의해 문을 닫는 1920년까지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분들은 이후 1930년대까지 독립 운동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들, 의열단, 김원봉 대장, 지청천 장군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일찍부터 지혜와 기지가 넘치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이회영은 독립운동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다가 뜻을 달리해서 베이징으로 옮긴 것이다. 이회영은 통찰과 선견지명이 있었고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에 이회영 선생의 베이징 집은 독립운동의 또 다른 근거지가 되었다.
어떤 조직에 있지는 않았으나, 이회영의 처소는 누구나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회영의 정신은 늘 날카로웠고 독립에 대한 열망은 뜨겁기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처량하고 궁핍했다. 가난해서 끼니를 겨우 이었고,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때가 많았다.
살림과 자식들 건사는 오롯이 부인의 몫이었다.
한편 이회영에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았다고 한다. 독립운동 계에서 이회영의 존재는 널리 알려졌고 신망이 두터웠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를 노리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이 접근했던 것이다.
또 일제가 보낸 밀정도 있었기 때문에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삶이었다.
명문가 사대부의 선비, 많은 독립운동가와 교분을 가진 인맥, 학식이 높고 예술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던 사람.
이회영은 능력이 출중하고 기개와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암흑은 깊어져만 갔고, 한 사람이 많은 일을 감당하기에는 벅찬 시절이었다.
저토록 수많은 난관과, 시험과 위험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었을까.
감히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졌다. 일제는 조선 침략을 넘어서 청나라를 침략할 야욕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청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항일의 터전이었는데 이제는 위험한 곳이 됐다.
1932년에 이회영은 만주로 가기 위해 황푸강에서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다롄.
다롄으로 가서 조선과 중국의 두 항일 연합 세력을 지도하려는 것이었다.
얼마후에 이회영의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11월 17일 부친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사망.’
창춘에서 살고 있던 이회영의 따님이 급히 경찰서로 갔다. 일본 형사는 유품으로 노인이 입었던 중국식 겨울 두루마기와 모자, 신발을 건네준다. 그리고 딸에게 아버지 얼굴을 확인시킨 후 화장을 강권했다.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회영은 심문을 당할 때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음에도 알고 있는 것들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선생이 지도하려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는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
상하이 거류민단장으로 이용로라는 조선사람이 있었다. 그는 밀정이었고 이회영의 계획을 입수하여 일제에 고급정보를 넘기는 만행을 저지른다.
출세에 눈이 멀었던 이 자 때문에, 우리 독립운동가의 거목 중의 한 명인 이회영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용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영 순국 후 3년 후에 이회영의 아들, 독립투사 이규창에 의해서 처단되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후련함을 절로 느꼈다.
이회영을 팔아 넘긴 것은 단순한 수사 협조가 아니라 매국의 명백한 증거였다.
또한 이 일이 알려짐으로써, 그동안 득의양양하던 밀정이 움츠러드는 계기도 주었을 것이다.
이회영은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었다. 뤼순 감옥은 지금 가면 특별전시장이 있다.
전시장에는 이 감옥에서 1910년 순국한 안중근 의사, 1936년 순국한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당시에 시신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기에 유해나마 조선으로 와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를 이 책에서 처음 듣고는 또 먹먹해지고 말았다.
당시에 개성군 송산리, 지금의 파주시 장단면이라는 곳에 유족들은 선생의 묘를 마련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서 사라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게 묘소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에 풍찬노숙을 하면서 끝까지 고생만 하시다 순국했는데, 또 다른 비극인 한국전쟁때 묘지마저 소실된 이회영.
참으로 기가 막혔다. 애통함을 감출 길이 없다.
이회영은 을사늑약 직후에 북만주 용정으로 떠났다. 내가 최애하는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북간도. 망국을 하고 국경을 넘어서, 오래전 고구려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으로 이주했던 사람들.
잠시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들의 심정과 처지를 떠올려 본다.
서럽고 궁핍했을 그들이 절망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이회영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면서 한번 더 이런 생각을 깊이 해보았다.
책은 명확한 서술과 저자의 열정으로 감동적으로 읽힌다.
몰랐던 수많은 사실들을 안 것이 너무도 좋았고, 묻혀졌던 이야기를 알아서 감사했다.
묻혀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회영은 친필과 글을 몇 가지 남겼다. 그것들은 길거나 구구절절하지 않으나, 하나같이 가슴을 쳤다.
두 가지를 적으며 서평을 마친다.
1910년에 중국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한 이회영 선생의 글이다.
『이러한 고초는 망국대부 亡國大夫의 가족으로서 국가에 속죄하는 것이며,
선열의 영혼에 사죄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일의 자주 국민이 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남긴 전언.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 100쪽)